해탈도론 제5권
8. 행문품 ②
此明求第二禪。
이제 제2선을 구하는 것을 밝힌다.
思惟初禪過患、二禪功德,爾時坐禪人欲樂起第二禪已,於初禪身得自在。何以故?若於初禪未得自在,雖復思惟欲除覺觀、望得二禪,還復退失,遂不堪起第二禪定,亦復不能入於初禪。如世尊說:爲諸比丘作山犢喩。
초선의 과환과 2선의 공덕을 사유한다. 이때 좌선인은 즐겁게 제2선을 일으키고자 하고, 초선에서 몸에 자재를 얻는다. 왜냐하면 만약 초선에서 자재를 얻지 못하면, 비록 다시 사유하여 각관을 없애고 2선을 얻고자 하여도 또 다시 물러나 마침내 제2선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초선에 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모든 비구를 위하여 송아지[山犢]의 비유를 들어 설한 것과 같다.
山犢愚癡不知食處,未解行步,欲詣嶮遠。便自作念:“我今當往未嘗至處,噉未嘗草、飮未嘗水”前足未立復擧後腳,蹉搖不安莫能前進,遂不得至未嘗至處,亦不得噉未嘗食草,及不得飮未嘗之水。更復思惟:“旣不能去,政當資昔飮食”
송아지가 어리석어 먹을 곳을 알지 못하고, 아직 걷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험하고 먼 곳에 가고자 하여 곧 스스로 ‘나는 이제 아직껏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 아직껏 먹어보지 못한 풀을 먹고,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시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발도 들지 못하면서 또 뒷다리를 들고, 넘어지고 흔들리며 불안하여 능히 전진하지 못하기에 결국은 아직껏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껏 맛보지 못한 풀을 맛보지 못하고, 아직껏 먹어보지 못했던 물을 먹지 못한다. 그러면 다시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예전에 먹던 음식에 의지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한다.
如是比丘愚癡未達,不知所行處,不解離欲入於初禪,不修此法不多學習,輒自作念:“欲入第二禪。離於覺觀。”不解自安,復更思惟:“我不能得入第二禪離於覺觀,欲退入初禪離欲”
이와 같이 비구가 어리석고 미숙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욕심을 떠나 초선에 들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법을 닦지 않고, 자주 학습하지 않았으면서 곧 스스로 ‘제2선에 들어 각관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안정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또 ‘나는 제2선에 들어 각관을 벗어날 수가 없다. 물러나 초선에 들어 욕심을 벗어나고자 한다’라고 생각한다.
愚癡比丘,如彼山犢不解行步。是故應修初禪令心得自在。
어리석은 비구는 그 송아지처럼 걷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초선을 닦아 마음으로 하여금 자재를 얻게 하여야 한다.
於未食時及食後時,初夜後夜隨心所樂,隨欲久近隨意無礙。爲起入觀,若從一時乃至多時;多入多出,若從一時乃至多時,於彼初禪成得自在。得自在樂,起第二禪越於初禪。復更思惟:此初禪麤、第二禪細,於初禪見有過患、於第二禪見有功德。
식사 전이나 식사 뒤, 또 초야와 후야에 마음이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 오랫동안 가까이 하고, 뜻에 따라 걸림 없이 일으켜 관에 들어야 한다. 만약 일시로 혹은 수시로 많이 들어가고 많이 나온다면, 만약 일시로 혹은 수시로 그 초선에서 자재를 얻게 되고 자재의 즐거움을 얻었다면 제2선을 일으켜 초선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다시 ‘이 초선은 거칠고, 제2선은 미세하다’라고 생각하고, 초선에 과환이 있는 것을 보고 제2선에 공덕이 있는 것을 본다.
問:云何初禪過患?
答近五蓋怨,令覺觀動,身成懈怠,心成散亂,其一切法,是爲麤定不任爲神通證。旣樂初禪不成勝分,是初禪過患。
【문】무엇이 초선의 과환인가?
【답】원수로 여기는 5개와 가깝고, 각관을 움직이게 하여 몸은 게을러지고 마음은 산란하게 된다. 그 일체법은 거친 정[麤定]이 되어 신통의 증득은 감히 이룰 수 없고, 초선을 즐기게 되면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초선의 과환이다.
第二禪功德是其對治。已觀初禪過患,復見第二禪功德,是一切入相作意修行第二禪事,不作意和合初禪、不作意於覺、不作意於觀,以從定生喜樂自在,令心受持。彼坐禪人如是作意,不久覺觀成滅,以定所起喜樂自在令心安住。
제2선의 공덕은 그것에 대한 대치이다. 이미 초선의 과환을 보았다면, 다시 제2선의 공덕을 보고 이 일체입(一切入)의 상(相)에 대해 작의하여 제2선의 사(事)를 수행하고, 초선과 화합하는 것을 작의하지 않고, 각(覺)을 작의하지 않고, 관(觀)을 작의하지 않고, 정으로부터 생긴 희락으로 자재하면 마음으로 수지하게 한다. 그 좌선인이 이와 같이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각관이 소멸하고 정으로써 일어난 희락이 자재하여 마음을 안주하게 한다.
此明二禪四枝義。彼坐禪人覺觀滅故,成其內信,心成一性,無覺無觀,從定生喜樂入第二禪。是地一切入功德。覺觀滅者,以善分別。覺觀滅亦名斷。
이제 2선의 4지의 뜻을 밝힌다. 그 좌선인은 각관이 소멸하는 까닭에 그 내신(內信)을 성취하고, 마음이 일성(一性)을 이루며,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정으로부터 희ㆍ락이 생겨 제2선에 든다. 이것은 지일체입의 공덕이다. 각관이 소멸한다는 것은 잘 분별함으로써 각ㆍ관이 소멸하는 것이며, 또는 단(斷)이라고도 한다.
問:云何爲覺觀滅?
答:亦是初禪覺觀過患,及一切覺觀根覺觀過患,及覺觀根與覺觀倂除故,成覺觀滅。復次以斷下麤禪,得上勝禪復令現次第滅。
【문】무엇을 각ㆍ관의 소멸이라 하는가?
【답】또한 이것은 초선의 각관의 과환, 및 일체 각관근(覺觀根)의 과환, 및 각관근과 각관을 함께 없애는 까닭에 각관의 소멸을 이룬다. 또 하열하고 거친 선[下麤禪]을 끊음으로써 훌륭하고 수승한 선[上勝禪]을 얻고, 또 현재에서 점차로 소멸하게 한다.
內者,現證名內。內有三種:一內內、二內定、三內行處。云何爲內內?謂六內入。內定者,於自觀身,此謂內定。內行處者,於內自思,意不出外,攝義是性,是謂內行處。於此經中,內內是可樂。
내(內)란 현증(現證)을 내라 한다. 내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내내(內內), 둘째는 내정(內定), 셋째는 내행처(內行處)이다. 무엇이 내내인가. 소위 6내입(內入)이다. 내정이란 스스로 몸을 관하는 것을 내정이라 한다. 내행처란 안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뜻을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며 섭의(攝義)를 그 성질로 하는 것, 이것을 내행처라 한다. 이 경에서는 내내가 바로 즐길만한 것이다.
信者,信正信,思惟增長信,此謂信於內定,是謂內信。
신(信)이란 신ㆍ정신(正信)ㆍ사유증장신(思惟增長信)으로 이것을 신이라 한다. 내정에서는 이것을 내신(內信)이라 한다.
內信者,何相?何味?何起?何處?不亂爲內信相,寂寂爲味,不濁是起,覺觀爲處。
내신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어지럽지 않은 것[不亂]이 내신의 상이고, 적적함이 그 맛이고, 혼탁하지 않은 것[不濁]이 그 일어남이고, 각ㆍ관이 그 처이다.
心成一性者,謂心住正定,此謂心成一性。心成一性者何義?心者是意。一者說於念。名性者,如聲論說生性。性者說自然義。此第二禪一心,能滅覺觀,以一性得起,此謂心成一性。
마음이 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마음이 정정(正定)에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마음이 일성에 머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마음이란 뜻[意]이고, 일(一)이란 염(念)을 말하는 것이다. 성(性)이라 하는 것은 성론(聲論)에서 설하는 생성(生性)과 같다. 성이란 자연의 뜻을 말한다. 이 제2선에서는 일심이 능히 각ㆍ관을 소멸함으로써 일성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心成一性者,何相?何味?何起?何處?專正爲相,寂寂爲味,無浪爲起,覺觀滅爲處。
마음이 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전정(專正)이 그 상이며, 적적이 그 맛이며, 일렁이지 않음[無浪]이 그 일어남이며, 각관의 소멸이 그 처이다.
問:信及心成一性,何故非初禪所攝?
答:初禪以覺觀爲浪動,故成濁,內信、心成一性者成不淸淨,如水有風浪,見於面像不復淸淨。如是初禪覺觀爲浪,浪動濁故,內信及心一性成不淸淨,是故以禪枝,非初禪所攝。
【문】믿음과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은 왜 초선에 포함되지 않는가?
【답】초선에서는 각ㆍ관에 의해 물결이 움직이는 까닭에 혼탁하게 되고, 내신(內信)과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이 청정하지 않게 된다. 물에 풍랑이 있으면 면상(面像)을 보는 데 있어 또한 청정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초선에서는 각ㆍ관이 물결이 되어 물결이 흔들리고 혼탁하게 되는 까닭에 내신 및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은 청정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이 선지(禪支)는 초선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無覺無觀者,謂斷覺無覺、離觀無觀。
각도 없고 관도 없다[無覺無觀]는 것은 각을 끊어 각이 없고 관을 벗어나 관이 없는 것을 말한다.
問覺觀滅、無覺無觀,此二種斷覺觀,何故說二?
答:覺觀滅者爲現內信,心一性爲因:無覺無觀爲現寂寂所成喜樂妙相。復次覺觀滅者,以此覺觀見覺觀過患,斷彼過患法,無覺無觀者,斷色界覺觀。
【문】각관의 소멸과 무각무관 이 두 가지는 모두 각ㆍ관을 끊는 것이다. 왜 이 두 가지를 설하는가?
【답】각관의 소멸이란 내신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마음의 일성을 원인으로 한다. 무각ㆍ무관은 적적으로 이루어지는 희락의 오묘한 상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또 각관의 소멸이란 이 각관으로써 각관의 과환을 보고 그 과환법을 끊는 것이다. 무각ㆍ무관은 색계의 각관을 끊는 것이다.
復次無覺無觀者有二種:一不以覺觀滅無覺無觀,以覺觀滅無覺無觀,於是五識及第三禪等,不以覺觀滅成無覺無觀。第二禪以方便寂寂故,以覺觀滅成無覺無觀。是說二義。
또 무각ㆍ무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각관의 소멸에 의하지 않는 무각ㆍ무관이고, (둘째는) 각관의 소멸에 의한 무각ㆍ무관이다. 오식(五識) 및 제3선 등에서는 각관의 소멸에 의하지 않고 무각ㆍ무관을 이룬다. 제2선에서는 방편적적에 의하는 까닭에 각관의 소멸하여 무각ㆍ무관을 이룬다. 이것이 두 가지 뜻을 설하는 것이다.
從定生者名定,初禪從彼智生,第二禪成從初禪定生。復次定者,於第二禪與一心共生故,定生喜樂。喜樂者,初已分別。
정(定)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은 정을 말한다. 초선은 그 지(智)로부터 생기고, 제2선은 초선의 정으로부터 생긴다. 또 정이란 제2선과 일심에서 함께 생기는 까닭에 정은 희락을 생기게 한다. 희락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다.
第二禪者,依初得名。此第二禪入正受者,謂入第二禪。禪者內信、喜、樂、一心,是名爲禪。入正受住者,成得第二禪,離於二枝,成就二枝三種善十相具足。二十三功德相應,是天住是功德,生光耀天。如初廣說。
제2선이란 초선에 의해 얻어진 이름이다. 이 제2선에 들어 정수(正受)하는 것을 제2선에 드는 것이라 한다. 선이란 내신ㆍ희ㆍ락ㆍ일심, 이것을 선이라 한다. 정수에 들어 머문다는 것은 제2선을 얻고, 2지를 벗어나 2지와 세 가지 선(善)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3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천주(天住)이고, 이 공덕으로 광요천(光耀天)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天住者,從定生喜樂,越人住故名爲天住。是故世尊告比丘言:如池生水,非四方來亦非雨出,無有時節,是從泉出,淸冷浸灌盈溢流遠。如是比丘,此身從定生喜樂。令得淸涼無不潤澤,。從定生喜周遍身心,猶如泉水。
천주란 정으로부터 희락을 일으켜 인간계를 초월해 머무는 까닭에 천주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샘에서 솟는 물은 사방에서 온 것도 아니고 비가 와서 생긴 것도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이로부터 샘물이 솟아 맑고 시원하고 고루 적시고 가득 넘치고 멀리 흐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자기 몸에서 정으로부터 희락을 일으켜 청량함을 얻어 윤택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고, 정으로부터 희를 일으켜 몸과 마음에 두루 변재하게 한다. 마치 샘물처럼.”
彼坐禪人入第二禪,其身可知。如不從四方無流水來、無天雨水,如是覺觀滅可知。如是從泉出流,令身成滿不起波浪。如是從定生喜樂,此名色身令滿不起亂心。如以冷水令身淸涼遍一切處,如是從定生喜樂。一切名色身成滿足修定果報,如是天居生光耀功德。
그 좌선인은 제2선에 들어 그 몸을 가히 알 수 있다. 사방에서 온 것도 아니고, 흘러든 물도 없고, 하늘에서 내린 빗물도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각관이 소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 몸을 가득 채우며 파랑이 일지 않듯이, 이와 같이 정으로부터 생긴 희락이 이 명색신(名色身)에 가득 차 어지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차가운 물이 몸을 시원하게 하고 모든 곳에 두루 미치듯이, 이와 같이 정으로부터 생기는 희락은 일체 명색신을 만족시킨다. 그리고 정을 닦은 과보로 이와 같이 천상에 거주하고 광요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얻는다.
此第二禪有三種,下、中、上。是坐禪人修下禪,命終生少光天,壽命二劫。修中禪生無量光天,壽命四劫。修上禪生光耀天,壽命八劫。
이 제2선에 세 종류가 있으니, 그것은 하ㆍ중ㆍ상이다. 이 좌선인이 하선을 닦으면 목숨을 마친 뒤 소광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2겁이다. 중선을 닦으면 무량광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4겁이다. 상선을 닦으면 광요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8겁이다.
念二禪過患。
제2선의 과환을 염한다.
爾時坐禪人已修第二禪身得自在,第二禪麤、三禪寂寂。知二禪過患、見三禪功德,起第三禪。
그때 좌선인은 제2선을 닦아 몸에 자재를 얻고 나서, 제2선은 거칠고 제3선은 적적하기에 제2선의 과환을 알고 3선의 공덕을 보아 제3선을 일으킨다.
云何二禪過患?謂近覺觀是定之怨。與喜滿相應故禪成麤,以喜成滿心大踊躍,不能起餘禪枝。
무엇이 2선의 과환인가. 소위 각관에 가깝기에 이는 정의 적이고, 희의 가득함과 상응하는 까닭에 선이 거칠어진다. 희가 가득함으로써 마음은 크게 용약하지만, 능히 다른 선지(禪支)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若著於喜是則爲失,若知是失則成不失。若不堪作神通證,若樂二禪不成勝分,是知第二禪過患。見第三禪功德,是其對治。已觀二禪過患,復見三禪功德,是依一切入相作意,令喜心滅。以由喜樂受持心,如是作意,不久以無喜樂令心得安。
만약 희에 집착하면 이것은 곧 실(失)이 된다. 만약 이 실을 알면 곧 부실(不失)을 이룬다. 만약 신통의 증득을 감히 이루지 못하고 2선을 즐기면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제2선의 과환임을 알고, 제3선의 공덕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대치이다. 이미 2선의 과환을 보았으면 또 3선의 공덕을 보아, 일체입의 상을 의지해 작의하여 희심을 소멸시킨다. 희락을 수지하는 마음을 말미암아 이와 같이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희가 없는 낙[無喜樂]으로써 마음은 편안을 얻는다.
解三禪枝。彼坐禪人不染喜故,得捨念智,以身受樂。是聖所說,得捨念智,樂住第三禪正受,是地一切入功德不染喜故。喜者先已分別。不染者,斷喜得捨住。
3선지를 풀이한다. 그 좌선인은 “희에 오염되지 않는 까닭에 사(捨)ㆍ염(念)ㆍ지(智)를 얻고, 몸으로 즐거움[樂]을 누린다.” 이것은 성스러운 가르침이다. 사ㆍ염ㆍ지ㆍ락을 얻고, 제3선의 정수(正受)에 머무는 것, 이것은 지일체입(地一切入)의 공덕으로, 희에 오염되지 않는 까닭이다. 희란 앞에서 이미 분별했다.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희를 끊고 사에 머무름을 얻는 것이다.
云何爲捨?是捨是護。不退不進是心平等,此謂捨。於是捨有八種,謂受捨、精進捨、見捨菩、提覺捨、無量捨、六分捨、禪枝捨、淸淨捨。
무엇이 사(捨)인가. 이 사는 호(護)이며, 물러나지도 나아가지도 않으며 마음이 평등한 것, 이것을 사라고 한다. 이 사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수사(受捨)ㆍ정진사(精進捨)ㆍ견사(見捨)ㆍ보리각사(菩提覺捨)ㆍ무량사(無量捨)ㆍ육분사(六分捨)ㆍ선지사(禪支捨)ㆍ청정사(淸淨捨)이다.
五根爲受捨。有時不作意捨相,爲精進捨。苦集我今當斷成得捨,爲見捨。修菩提覺,是爲菩提捨。慈悲喜捨,是爲無量捨。以眼見色不苦不喜成捨,是爲六分捨。無染故成捨住者,是禪枝捨。捨念淸淨,是淸淨捨。於此八捨,除受捨,餘七捨法,是爲平等捨。
5근(根)이 수사가 된다. 때때로 작의하지 않는 사상(捨相)을 정진사라 한다. “괴로움과 집착[集]을 나는 마땅히 끊어야 한다”라고 하여 얻게 되는 사를 견사라 한다. 보리각을 닦는 것이 보리사이다. 자ㆍ비ㆍ희ㆍ사 이것은 무량사이다. 눈으로 색을 보아도 괴로워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사를 이루는 것, 이것이 6분사이다. 오염되지 않는 까닭에 사를 이루어 머무는 것, 이것이 선지사이다. 사를 청정하게 생각하는 것, 이것은 청정사이다. 이 8사 중에 수사를 제외한 나머지 7사법, 이것이 평등사이다.
復次有三種捨:一相應乘、二少經營、三無經營。
또 세 가지 사가 있으니 첫째는 상응승(相應乘), 둘째는 소경영(少經營), 셋째는 무경영(無經營)이다.
於一切禪行,是禪平等方便。不急疾不遲緩,是名相應乘捨,此下捨近第二禪,能斷大踊躍心。若心無經營,是名少經營,捨此捨近第三禪,是其能斷一切踊躍心。以不動身心,無經營事心,是名無事捨,此捨近第四禪。
일체의 선을 행함에 있어서 선(禪)의 평등한 방편이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것, 이것을 상응승사(相應乘捨)라 한다. 이것은 하사(下捨)로서 제2선에 가깝고, 능히 크게 용약하는 마음을 끊는다. 마음에 경영이 없는 것, 이것을 소경영사(少經營捨)라 한다. 이 사는 제3선에 가깝고, 이것은 능히 일체의 용약하는 마음을 끊는다. 움직이지 않는 몸과 마음으로써 사(事)를 경영하는 마음이 없는 것, 이것을 무사사(無事捨)라 한다. 이 사는 제4선에 가깝다.
捨者何相?何味?何起?何處?平等爲相,無所著爲味,無經營爲起,無染爲處。
사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평등이 그 상이고,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 그 맛이며, 경영이 없는 것이 그 일어남이며, 오염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問:何故說此捨於此禪,非第二禪及初禪?
答:是處喜滿未滅心著。以緣喜樂是故未滅,以大踊躍充遍身心,是故於二種禪不說捨,以不滿故。於此第三禪無喜染故,以滅相著故成起禪枝,以由禪枝自在故說捨念正智。云何爲念?念隨念,彼念覺憶持不忘。念者,念根,念力、正念,此謂念。
【문】왜 이 사를 제2선이나 초선이 아닌 이 선에서 설하는가?
【답】이 처는 희가 가득하고 아직 마음의 집착을 소멸하지 못한 것이다. 희락을 인연하는 까닭에 아직 소멸하지 못하고, 크게 용약함으로써 몸과 마음에 충만하다. 이러한 까닭에 두 가지 선에서는 사를 설하지 않나니, 충만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 제3선에서는 희의 오염이 없는 까닭에 상에 대한 집착을 소멸함으로써 선지를 일으키게 되고, 선지가 자재한 까닭에 사ㆍ염ㆍ정지(正智)를 설한다. 무엇이 염인가. 염은 수념(隨念)이고, 그 염은 기억하고 보전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염이란 근(根)을 염하고, 역(力)을 염하는 정념(正念)으로 이것을 염이라 한다.
問:念者何相?何味?何起?何處?
答:隨念爲相,不忘爲味,守護爲起,四念爲處。
【문】염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답】수염(隨念)이 상이고, 잊지 않음이 맛이며, 수호가 일어남이며, 4념이 처가 된다.
云何爲智?知解爲慧,是正智此謂爲智。於是正智有四種:有義智、自相智、不愚癡智、行處智。於是有義智者,有四威儀。自相智者,入於空處。不愚癡智者,知於世閒八法。行處智者,謂於事處。於此經中,行處智是可取。
무엇이 지(智)인가. 지해(知解)는 혜(慧)이며, 이 정지(正智)를 지라고 한다. 여기서 정지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즉 유의지(有義智)ㆍ자상지(自相智)ㆍ불우치지(不愚癡智)ㆍ행처지(行處智)이다. 여기서 유의지는 4위의를 갖는 것이고, 자상지는 공처에 드는 것이며, 불우치지는 세간의 8법을 아는 것이고, 행처지는 사(事)에 처하는 것이다. 이 경에서는 행처지를 취해야 한다.
問:智者何相?何味?何起?何處?
答:不愚癡爲相,緣著爲味,擇取諸法爲起,正作意爲處。
【문】지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답】어리석지 않음을 상으로 삼고, 연착(緣著)을 맛으로 삼고, 모든 법을 선택하여 취함을 일어남으로 삼고, 바른 작의를 처로 삼는다.
問:何故此念正智一切處不妙?
答:若人失念不起正智不堪起禪外行。
【문】어째서 이 염ㆍ정지는 일체처에서 빠지지 않는가?
【답】만약 사람이 염을 잃으면 정지는 일어나지 않고, 선의 외행(外行)도 감히 일으킬 수 없다.
問:何故說第三禪,不說第二禪及初禪?
答:於此喜爲首,麤禪枝滅故、正定細故。此定入細處,以此正智堪能起第三禪,是故以禪枝自在。
【문】왜 제3선을 설하고 제2선과 초선을 설하지 않는가?
【답】여기서는 희가 으뜸이 된다. 거친 선지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정(正定)이 세밀하기 때문에 이 정은 세밀한 곳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정지로써 능히 제3선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선지가 자재하게 된다.
復次此禪易起到彼樂處,最氣味地,亦作愚心,是名著處。是故於此禪,知得自在堪爲斷喜。又說喜樂者共爲親友,是故此念智分別,無喜有樂於事成住。
또 이 선은 쉽게 일어나 그가 가장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에 태어나게 하고, 또 어리석은 마음을 만든다. 이것을 착처(著處)라 한다. 이런 까닭에 이 선에서 자재를 얻을 줄 알아야 희를 끊는 것을 감당하게 된다. 또 희와 낙은 서로 친구라고 설한다. 이런 까닭에 이 염(念)ㆍ지(智)로 분별해야 희는 없고 낙이 있는 것이 일에 머물게 된다.
如彼犢子隨逐其母,不捉兩耳觸突隨母。如是無喜有樂,以念智分別樂得住行處。若不緩分別,反入於喜,成禪退分。以此禪枝自在,故說念智。以此捨念智成就,是故說有捨念智以身受樂。
송아지가 어미를 따를 때 양쪽 귀를 잡아떼어놓지 않으면 어미에게 들러붙어 따라다니는 것과 같다. 희가 없고 낙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염ㆍ지로 분별해야 낙이 머물고 행할 곳을 얻게 된다. 만약 느슨하게 떼어놓지 않으면 도리어 희에 들어가 선이 퇴분을 이루게 된다. 이 선지가 자재한 까닭에 염ㆍ지를 설하고, 이것으로써 사ㆍ염ㆍ지를 성취하기 때문에 사ㆍ염ㆍ지가 있어 몸으로 즐거움을 누린다고 설한다.
問:云何心樂?
答:心攝受是心樂,從心觸生攝受,是心樂受是謂爲樂。
【문】무엇이 마음의 즐거움[心樂]인가?
【답】마음이 섭수하는 것을 심락이라 하며,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생기는 섭수가 심락수(心樂受)이다. 이것을 낙이라고 한다.
問:云何身?
答:想陰、行陰、識陰,此謂爲身。此樂以身受,謂身受樂。
【문】무엇이 몸[身]인가?
【답】상음(想陰)ㆍ행음(行陰)ㆍ식음(識陰) 이것을 몸이라 하고, 이 즐거움을 몸으로 받는 것을 신수락(身受樂)이라 한다.
問:何故此樂無喜,非以身爲受?
答:於第三禪樂根滅。何故世尊說於第三禪樂根滅?是樂聖人所說。聖者佛及弟子,開合制敎分別顯示,此謂聖所說。
【문】왜 이 낙에는 희가 없으며, 몸으로 받는 것이 아닌가?
【답】제3선에서는 낙의 근이 소멸하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세존께서 “제3선에서 낙의 근은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낙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성(聖)이란 부처님과 제자이다. 열고, 합하고, 제교(制敎)하고, 분별하고, 현시하는 것, 이것을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라 한다.
問:何故聖說於此身,非餘處?
荅:此第三禪易起到彼樂處,彼無受樂;聖者向於樂住,是聖人成就,是故聖人說此禪勝成捨。有念樂住者捨念樂,此已分別。
【문】왜 성인께서는 다른 처가 아닌 이 몸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답】이 제3선은 쉽게 일어나 그 낙처에 도달하지만, 그곳에서 낙을 받는 것이 없다. 성자는 낙을 향하여 머물고, 이것을 성인은 성취한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이 선이 훌륭하다고 말한다. 사(捨)를 이루며, 염(念)이 있고, 낙(樂)에 머무는 것이 사ㆍ염ㆍ낙이니, 이것은 이미 분별하였다.
成就入住第三禪。第三者,依第二名爲第三。第三禪者,是捨念、正智、樂、一心此謂禪成就。入住者,彼已得第二禪,離一分五分,成就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天居,生遍淨天。如初禪廣說。
“제3선을 성취하고, 들어가 머문다”에서 제3은 제2에 의지하는 까닭에 제3이라 한다. 제3선은 이 사ㆍ염ㆍ정지(正智)ㆍ낙ㆍ일심인데, 이것을 선의 성취라 한다. 들어가 머문다는 것은 그가 이미 제2선을 얻어 1분과 5분을 벗어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여 천상에 거주하고 변정천에 태어나니, 초선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天居者,無喜樂住,越人住名天居。是故世尊告諸比丘:如是比丘,於鬱波羅池花、分陁利池花,若鬱波羅花、波頭摩花、分陁利花,水生水增長,從水起住水中,從根至首以令水滿其中。如是比丘,此身以無喜樂令滿潤澤,以無喜之樂遍滿身心。
천상에 거주한다는 것은 희가 없는 낙에 머문다는 것으로 인간계를 초월해 머무는 것을 천상에 거주한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에게 “이와 같이 비구여, 울파라 연못에 핀 꽃과 분다리 연못에 핀 꽃에서 울파라꽃ㆍ파두마꽃ㆍ분다라꽃 등은 물에서 생기고, 물에서 자라나고, 물로부터 일어나고, 물속에 머물면서 뿌리부터 머리까지 물속에 있게 한다. 이와 같이 비구여, 이 몸도 희가 없는 낙으로써 가득히 윤택하게 하며, 희가 없는 낙이 온 몸과 마음에 가득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於是如鬱多羅、波頭摩、分陁利花從水而起。如是入第三禪,其身當知如藕生水,從根至首一切皆滿。如是入第三禪,其身以無喜之樂遍滿身心,修定果報。如是天居生遍淨天功德。此第三禪亦成三種,謂上、中、下。於是坐禪人修行下禪,命終生少淨天,彼壽命十六劫。修行中禪生無量淨天,彼天壽命三十二劫。修行上禪生遍淨天,壽命六十四劫。
여기서 울다라ㆍ파두마ㆍ분다리꽃이 물로부터 일어나듯, 이와 같이 제3선에 들면 그 몸은 연이 물에서 생겨나 뿌리부터 머리까지 일체에 가득함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제3선에 들면 그 몸은 희가 없는 낙으로써 몸과 마음에 가득하게 된다. 정을 닦은 과보로 이와 같이 천상에 거주하고 변정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얻는다. 이 제3선 역시 세 가지를 이루니, 곧 상ㆍ중ㆍ하이다. 여기서 좌선인이 하선을 수행하면 목숨을 마친 뒤 소정천(少淨天)에 태어나며, 그 수명은 16겁이다. 중선을 수행하면 무량정천(無量淨天)에 태어나고, 그 수명은 32겁이다. 상선을 수행하면 변정천에 태어나고, 수명은 64겁이다.
念三禪過,爾時坐禪人如是已作,第三禪身得自在樂,起第四禪越第三禪。第三禪麤、第四禪妙,見第三禪過患,復見第四禪功德。
3선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이와 같이 제3선을 지어 몸으로 자재의 즐거움을 얻고 나서, 제4선을 일으켜 제3선을 초월한다. 제3선은 거칠고, 제4선은 묘하기에 제3선의 과환을 보고, 또 제4선의 공덕을 본다.
云何三禪過患?謂近喜爲怨。正定以樂枝麤,不能堪忍爲得神通,第三禪不成勝分。如是見第三禪過患,見第四禪功德是其對治。彼坐禪人。如是已見第三禪過患、見第四禪功德,唯彼作一切入相作意,令現滅樂滅。以由捨心受持,如是作意不久,以由捨心得安。
무엇이 3선의 과환인가. 소위 원수로 여기는 희와 가깝기에 정정(正定)은 낙지(樂支)에 의해 거칠어지고, 감히 신통을 얻을 수 없어 제3선은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한다. 이와 같이 제3선의 과환을 보고 제4선의 공덕을 보니, 이것은 그것에 대한 대치이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제3선의 과환을 보고 제4선의 공덕을 보고는, 오로지 그는 일체입의 상에 대한 작의를 지어 현재에서 낙을 소멸한다. 없앰으로써 사(捨)로 인해 마음이 수지되고, 이와 같이 작의하여 오래지 않아 사(捨)로 인해 마음이 편안을 얻는다.
解四禪枝。彼坐禪人斷樂故,先已斷苦故,以初喜憂盡故,不苦不樂捨念淸淨成就,住第四禪。是地一切入功德。
4선지를 풀이한다. 그 좌선인은 낙을 끊은 까닭에, 먼저 이미 고를 끊은 까닭에, 처음의 기쁨[喜]과 걱정[憂]이 모두 없어진 까닭에, 불고불락의 사념(捨念)이 청정함을 성취하여 제4선에 머문다. 이것이 지일체입의 공덕이다.
斷樂者名身樂斷。斷苦者名身苦斷。前喜憂滅者,喜名心樂、憂名心苦,皆盡滅也。
낙을 끊은 것은 몸의 즐거움을 끊는 것이고, 고를 끊는 것은 몸의 괴로움을 끊는 것이다. 이전의 기쁨과 걱정이 소멸한다는 것에서 기쁨이란 마음의 즐거움이고, 걱정이란 마음의 고통이다. 이것이 모두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이다.
問:樂苦憂已斷,何處滅?
荅:初禪時滅。於此第四禪,佛說苦滅。
【문】즐거움과 고통과 걱정을 이미 끊었는데 어느 처에서 소멸하는가?
【답】초선 때에 소멸한다. 이 제4선에서는 고가 소멸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問:何處苦根起無餘時滅?
荅:佛告比丘:初禪成就離欲,是處苦根起無餘時滅。
【문】어느 처에서 고근(苦根)이 일어나 무여시(無餘時)에 소멸하는가?
【답】부처님께서 비구에게 “초선에서 이욕(離欲)을 성취한다. 이 처에서 고근이 일어나 무여시에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다.
問:何故於初禪苦根滅?
答:以喜滿故身樂,身樂故苦根滅,以斷對治故,是故於初禪苦根滅。於第二禪憂根滅,成斷憂根。
【문】어떠한 까닭에 초선에서 고근이 소멸하는가?
【답】희가 가득한 까닭에 몸이 즐겁고, 몸이 즐거운 까닭에 고근이 소멸한다. 단(斷)으로 대치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초선에서 고근이 소멸하고, 제2선에서 우근(憂根)이 소멸하며 우근이 끊어지게 된다.
如佛所說:何處喜根起無餘時滅?於此比丘覺觀滅故。第三禪正受住,是處憂根起無餘時滅。
부처님께서 “어느 처에서 희근이 일어나 무여시에 소멸하는가. 이 비구에게서 각과 관이 소멸하는 까닭에 제2선을 정수하여 머물고, 이 처에서 우근이 일어나 무여시에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다.
何故第二禪憂根滅?若有覺觀久隨覺觀,成身懈怠、成心懶墯,若心懶墯憂根卽起。於第二禪覺觀滅,說憂根滅。
어떠한 까닭에 제2선에서 우근이 소멸하는가. 만약 각ㆍ관이 있으면 오랫동안 각ㆍ관에 따라 몸이 게을러지고 마음이 나태해지며, 만약 마음이 나태해지면 우근이 곧 일어난다. 제2선에서 각ㆍ관이 소멸하는 것을 우근이 소멸한다고 설한다.
於第三禪是處樂滅。如世尊說:何處樂根起無餘時滅?於此比丘厭於喜故,第三禪入正受住,是處樂根已起無餘時滅。
제3선, 이 처에서는 낙이 소멸한다. 세존께서 “어느 처에서 낙근이 일어나며 무여시에 소멸하는가. 여기에서 비구는 희를 싫어하는 까닭에 제3선에 들어가 정수하여 머문다. 이 처에서 낙근이 이미 생겨나 무여시에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問:何故於第三禪樂根滅?
答:喜滅故。喜爲因,樂成滅,是故於第三禪樂根滅。
【문】어떠한 까닭에 제3선에서 낙근이 소멸하는가?
【답】희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희는 낙의 소멸을 이루는 원인이다. 이러한 까닭에 제3선에서 낙근이 소멸한다.
問若苦樂憂於三禪處已滅,何故於此四禪說滅?
答:三禪,是四禪道路,於三禪已滅受,是故於第四禪說滅。
【문】만약 고ㆍ락ㆍ우가 제3선에서 이미 소멸했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이 제4선에서 소멸한다고 설하는가?
【답】3선은 이 4선에 이르는 길이며, 3선에서 이미 수(受)가 소멸한다. 이런 까닭에 제4선에서 소멸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復次以不苦不樂受爲現對治,是故說苦樂對治不苦不樂受。復次四禪共對治受收合故。復次捨煩惱現無餘斷。
또 불고불락의 수로써 현재에서 대치로 삼는다. 이러한 까닭에 고ㆍ락을 불고불락의 수로 대치한다고 설한다. 또 4선은 함께 수를 대치하여 거두어 모으는 까닭이며, 또 사(捨)는 번뇌를 현재에서 남김없이 끊는 까닭이다.
不苦不樂受者,意不攝受、心不棄捨,此謂不苦不樂受。
불고불락의 수는 의가 섭수하지 않고, 마음이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불고불락의 수라 한다.
不苦不樂受者,何相?何味?何起?何處?中閒爲相,住中爲味,除是起喜滅是處。
불고불락의 수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중간을 상으로 하며, 중간에 머무는 것을 맛으로 하며, 없앰이 일어남이며, 희가 소멸하는 것이 처이다.
云何捨念淸淨者?是謂中性爲捨,此謂爲捨。念者,謂念、隨念、正念,此謂爲念。以捨爲念,成分明淸白,此謂捨念淸淨。
무엇이 사(捨)ㆍ염(念)ㆍ청정(淸淨)인가. 이 중성(中性)이라 하는 것이 사가 되나니 이것을 사라 한다. 염이란 그 염(念)이 수념(隨念)ㆍ정념(正念)인 것을 염이라 한다. 사로써 염을 삼아 분명(分明)ㆍ청백(淸白)을 이루는 이것을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 한다.
問:何故此念以捨分明淸白?
答:此捨離一切煩惱故、受相似相應故,成不動無經營,以此無經營與捨相應故。此念至無動成無經營,是故此念已捨成分明淸白。
【문】어떠한 까닭에 이 염은 사로써 분명ㆍ청백이 되는가?
【답】이 사는 일체번뇌를 벗어나는 까닭에, 수(受)와 비슷하게 상응하는 까닭에, 부동(不動)ㆍ무경영(無經營)을 이룬다. 이 무경영으로 사와 상응하는 까닭에 이 염은 무동(無動)에 이르고, 무경영을 이룬다. 이러한 까닭에 이 염은 사로써 분명ㆍ청백을 이룬다.
四者,依彼三禪,此第四成就。入定者,此謂四禪捨念一心,此謂禪成就。入住者,成得彼第四禪,離一分三分,成就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報居天上,生果實天。功德如初廣說。
4란 그 3선에 의지해 이 제4가 성취된다. 입정(入定)이란 4선에서 사념이 일심인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선의 성취라 한다. 입주(入住)란 그 제4선을 얻게 되어 1분과 3분을 벗어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 과보로 천상에 거주하고, 과실천(果實天)에 태어나는 공덕을 이루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天居者,捨樂住出於人住,此謂天居。是故世尊告諸比丘:有人坐,以白疊覆身,從頭至足一切身分無處不著。如以白疊無不覆處,如是比丘以淸白心令滿一切身分。以淸白心無所不著。
천상에 거주한다는 것은 사의 즐거움에 머물러 인간계를 벗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천상에 거주하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에게 “어떤 사람이 앉아서 흰 천을 겹쳐 몸을 감싸는데 머리부터 발에 이르기까지 온 몸 구석구석 두르지 않은 곳이 없다. 흰 천을 겹쳐 감싸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비구는 청백한 마음으로 온 몸 구석구석을 채워 청백한 마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譬如有人白疊自覆,是坐禪人亦復如是,離一切上煩惱,在第四禪可知如。以白疊覆身從頭至足,不寒不熱,時節調和身心淸淨。如是入第四禪不苦不樂,是爲捨樂。令滿於身。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흰 천을 겹쳐 스스로 감싸는 것처럼, 이 좌선인 또한 이와 같이 모든 상번뇌(上煩惱)를 벗어나 제4선에 머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흰 천을 겹쳐 몸을 감싸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춥지도 덥지도 않게 하고 때를 잘 조절하여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듯이 이와 같이 제4선에 들어 불고불락 하니, 이것이 사의 즐거움을 온 몸에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修定果報,如是天居生果實天功德。修第四禪命終凡夫,生果實天。若心厭患,生無想天,壽命五十劫。若沙門,或生果實天、或生五淨居處。如是果實功德。
정을 닦은 과보로 이와 같이 천상에 거주하고, 과실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얻는다. 제4선을 닦다가 목숨을 마친 범부는 과실천에 태어난다. 만약 마음이 과환을 싫어하면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며, 수명은 50겁이다. 만약 사문이라면 과실천에 태어나거나 5정거천에 태어나니, 이와 같은 과실의 공덕이 있다.
問:何故於三禪處,下中上說果地勝,不說第四禪?
答:依三禪所得有麤有妙,是故以勝枝說果地勝。此第四禪已到妙枝彼岸,從此更無妙枝,是故於此無勝果地。
【문】어떠한 까닭에 3선처에는 하ㆍ중ㆍ상과 과지(果地)의 수승함을 설하면서 제4선에서는 설하지 않는가?
【답】3선에서는 얻는 바에 거침이 있고 묘(妙)가 있다. 이러한 까닭에 승지(勝支)로써 과지(果地)의 수승함을 설한다. 이 제4선은 이미 묘지(妙支)의 피안에 이르러, 이로부터 다시는 묘지가 없다. 따라서 여기에는 승과지가 없다.
念四禪過。爾時坐禪人,於第四禪已得自在樂,遊虛空定越於色界。復更思惟,色定麤、虛空定細。彼坐禪人見色過患,復見虛空定功德。
4선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제4선에서 자재의 즐거움을 얻고 나서 허공정(虛空定)에 노닐며 색계를 초월한다. 또 다시 “색정(色定)은 거칠고 허공정은 미세하다”라고 사유하면서 그 좌선인은 색의 과환을 보고, 또 허공정의 공덕을 본다.
云何色過患?如取器仗相打鬪諍、兩舌妄語、截手腳等種種諸事,眼痛疾患寒熱飢渴諸苦,是謂色欲過患。
무엇이 색의 과환인가. 무기나 몽둥이를 들고 서로 때리고 싸우며, 이간질하고 거짓말하고 손발을 자르는 등의 갖가지 일이 있고, 눈이 아프고 병이 나고 덥고 춥고 목이 마르는 등 갖가지 고통이 있다. 이것을 색욕(色欲)의 과환이라 한다.
云何第四禪過患?此近喜成怨,依於色事,是名爲麤。於是著樂,不成勝分,依虛空寂寂解脫。於此定成麤,於色見第四禪過患,見虛空定功德,是其對治。
무엇이 제4선의 과환인가. 이것은 원수로 여기는 희와 가깝고, 색사(色事)를 의지하는 까닭에 이것을 거칠다[麤]고 한다. 여기서 즐거움에 집착하면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하기에 허공에 의지해 적적한 해탈을 이룬다. 그리고 이 정에서 거칠음을 이루면 색에서 제4선의 과환을 보고, 허공정의 공덕을 본다. 이것이 그 대치이다.
彼坐禪人。如是已見於色及見第四禪過患,已見虛空定功德,念入第四禪明無邊虛空定。從此定起除地一切入相,修虛空定地相成失。於虛空所作事無邊作意,若如此現作意不久地相成失。從地相心起成越於虛空,以虛空入相自在心得安。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색을 보고 제4선의 과환을 보고 나서, 허공정의 공덕을 보고 나서, 염으로 제4선에 들어가 무변허공정을 밝히고, 이 정으로부터 일어나 지일체입의 상을 없애고, 허공정을 닦아 지상(地相)이 없어짐을 이루며, 허공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끝이 없다고 작의한다. 만약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지상이 없어지고, 지상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 허공으로 초월하게 되며, 허공입(虛空入)의 상이 자재함으로써 마음이 편안을 얻는다.
彼坐禪人已起一切色相有對想滅,於種種想不作意故,正受入住無邊空處。
그 좌선인은 이미 일체의 색상(色相)을 초월하고 유대상(有對想)이 소멸하며, 갖가지 상(想)을 작의하지 않는 까닭에 무변공처(無邊空處)를 정수하여 들어가 머문다.
一切者,說於無餘起。色相者,云何色相?入色界定想智正智,此謂色相。越者,從此起有對想滅者。云何是有對想?色想、聲想、香想、味想、觸想,此謂有對想。滅者,彼種種想盡不作意者。云何種種想?不入定人,或意界和合、或意識界和合想智正智,此謂種種想。此種種想不作意,此謂種種想不作意。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한다. “색상을 초월한다”에서 무엇이 색상인가. 색계정에 들었을 때의 상지(想智)ㆍ정지(正智), 이것을 색상이라 한다. “초월[越]”이란 이것으로부터의 초월이다. “유대상이 소멸한다”에서 무엇이 유대상인가. 색상(色想)ㆍ성상(聲想)ㆍ향상(香想)ㆍ미상(味想)ㆍ촉상(觸想), 이것을 유대상이라 한다. “소멸”이란 그 갖가지 상이 다하는 것이다.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다”에서 무엇이 갖가지 상인가. 정에 들지 않는 사람, 혹은 의계가 화합하거나, 혹은 의식계가 화합하거나, 상지ㆍ정지가 있는 것, 이것을 갖가지 상이라 한다. 그리고 이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 것, 이것을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問:何故止說越想,不說受行識?
答:若越於想,彼一切皆亦成越。何以故?若不離想,心不得越。復次世尊欲說越色事,說越色想,一切定事皆由想故。
【문】어떠한 까닭에 상을 초월한다고 설하는 것에서 그치고, 수ㆍ행ㆍ식은 설하지 않는가?
【답】만약 상을 초월한다면 그 일체를 역시 모두 초월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상을 떠나지 않으면, 마음이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세존께서는 색사(色事)를 초월하는 것을 설하고자 하시면서 “색상(色想)을 초월하라”고 설하셨으니, 일체 정의 일들은 모두 상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問:若不爾,入色定有對想種種想非爲無也。
答:有人入色界定,有對想有種種想以斷故。
【문】만약 그렇지 않다면, 색정에 들어도 유대상ㆍ갖가지 상은 없는 것이 아닌가?
【답】어떤 사람이 색계정에 들어도 유대상과 갖가지 상이 있으니, 끊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問?何故於彼不修道?
答:爲厭於色,是故於彼不滅、於彼不盡故。
【문】어떠한 까닭에 거기에서 도를 닦지 않는가?
【답】색을 싫어하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거기에게서는 소멸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入初禪,聲是其刺如是。佛所說於此爲厭色以修行道,是故於此成斷。於此斷故,無色定不動行想。寂寂解脫想,如迦蘭鬱頭藍弗入無想定,五百車從前去來不見不聞,是故說於處滅。
초선에 들었을 때는 소리[聲]가 그 자극[刺]이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여기에서는 색을 싫어하기 위해 도를 수행한다. 이런 까닭에 여기에서 끊음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끊는 까닭에 무색정ㆍ부동행상(不動行想)ㆍ적적해탈상이 있으니, 가란ㆍ울두람불이 무상정에 들어 5백 대의 수레가 이전과 같이 오고가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에 처에서 소멸을 말한다.
於是起一切色想,說斷色界法有對想、滅種種想。不作意者,說斷欲界法。復次越一切色想者,說得無色界。有對想滅者,說斷彼定外亂,爲顯現無動種種想。不作意者說斷定內亂,說顯現寂寂解脫相。
여기에서 일체 색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색계법을 끊고, 유대상이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욕계법을 끊는 것을 말한다. 또 일체 색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무색계를 얻는 것을 말하고, 유대상이 소멸한다는 것은 그 정의 외란(外亂)을 끊고 무동(無動)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의 내란(內亂)을 끊고 적적해탈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問:無邊虛空者,云何爲空?
答:是空入空界空穴,不爲四大所觸,此謂爲空於空。正安心令滿無邊,此謂無邊。無邊空者,是無邊空入,入虛空處心心數法,此謂虛空入。虛空入者何義?是虛空無邊性。是無邊性空處,此說虛空義。如住天處名天處,彼虛空處定,此謂虛空處。
【문】무변허공에서 무엇이 공인가?
【답】이것은 공입(空入)ㆍ공계(空界)ㆍ공혈(空穴)이다. 4대에 저촉되는 바가 아니므로 이것을 공이라 한다. 공에서 마음을 바르게 안정시켜 무변에 가득하게 되는 것, 이것을 무변이라 하다. 무변공이란 무변공입(無邊空入)이니 허공처에 든 심법과 심수법, 이것을 허공입이라 한다. 허공입이란 무슨 뜻인가. 이 허공은 무변성이고, 이 무변성이 공처이니, 이것을 허공의 뜻이라 한다. 그리고 천처(天處)에 거주하는 것을 천처라 하는 것과 같이, 그 허공처정을 허공처라 한다.
入正住者,得虛空處定,越色事三分,成就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寂寂居住修定果報。此功德生虛空處,如初廣說。功德生虛空者,已修虛空處,命終生虛空天,壽命二千劫。
“들어가 올바로 머문다”는 것은 허공처정을 얻어 색사(色事)의 3분을 초월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여 정을 닦은 과보에 적적하게 거주하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허공처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공덕으로 허공에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허공처를 닦았기에 목숨을 마친 뒤 허공천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니, 수명은 2천겁이다.
念虛空定過。爾時彼坐禪人於虛空處已得自在樂,起識一切入定,越虛空一切入。思惟虛空定麤、見識處細,復見虛空過患、復見識處功德。
허공정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그 좌선인은 허공처에서 자재의 즐거움을 얻고 나서, 식일체입정(識一切入定)을 일으켜 허공일체입을 초월한다. 그리고 허공정이 거친 것을 사유하고, 식처(識處)가 미세한 것을 본다. 또 허공의 과환을 보고, 또 식처의 공덕을 본다.
云何虛空過患?此定近色爲怨,於虛空定是事成麤。與有對想種種想不相遠離,成彼念著不得勝分。如是見虛空過患,是識一切入功德是其對治,明無邊識定治。
무엇이 허공의 과환인가. 이 정은 원수로 여기는 색과 가깝고, 허공정에서 이 일은 거침을 이룬다. 유대상이나 갖가지 상[種種想]과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기에 그 염에 집착하게 되어 승분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허공의 과환을 보고 식일체입의 공덕을 보고는 그 대치로서 무변식정을 밝힌다.
彼坐禪人已見如是虛空過患、已見識處功德,安詳念入安詳念起,修虛空識令滿作意,令識無邊。由識處想心受持,如是現作意,不久從虛空處想心起越於識處,由識處想而心得安。彼坐禪人起一切虛空故,思惟無邊識,成就入正受,於一切識處住。
그 좌선인은 이미 이와 같이 허공의 과환을 보고, 이미 식처의 공덕을 보고, 느긋하게 입(入)을 염하며, 느긋하게 기(起)를 염한다. 그리고 허공식을 닦아 가득케 하고, 작의하여 식을 무변케 하고, 식처상을 말미암아 마음을 수지(受持)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허공처상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 식처로 초월하고, 식처상으로 인하여 마음이 편안함을 얻는다. 그 좌선인은 일체허공을 초월하는 까닭에 무변의 식을 사유하며, 일체식처에 들어가 정수(正受)를 성취하여 머문다.
一切者,說於無餘。越虛空處者,越虛空處。越者謂正度,是謂越一切虛空處。無邊識者,唯彼虛空以識作意令滿無邊,是謂無邊識處。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하고, 허공처를 초월한다는 것은 허공처를 초월하는 것이다. 초월이란 올바로 분별[正度]이니, 이것은 일체 허공처를 초월하는 것이다. 무변의 식이란 오직 그 허공을 식으로 작의하여 끝없이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변식처라 한다.
問:色非色法,云何執爲無邊?
答:唯無色法故成無邊。何以故?非色之法無有邊際,不可得故。
【문】색법과 비색법 중에서 무엇을 무변으로 삼는가?
【답】오직 무색법에 의지하는 까닭에 무변을 이룬다. 왜냐하면 색 아닌 법은 변제(邊際)가 없고, 가히 얻을 수도 없는 까닭이다.
復次虛空無邊,故說無邊。無邊者,作無邊意,故成無邊。是故不妨識。入處者,是入識處。心心數法,此謂識處。識處者何義?
또 허공이 무변한 까닭에 무변을 설한다. 무변이란 무변이라는 생각을 짓는 까닭에 무변을 이루며, 이러한 까닭에 방해를 받지 않는 식이다. 입처(入處)란 식처에 들어간 심법ㆍ심수법으로 이것을 식처라 한다. 식처란 무슨 뜻인가.
是識無邊,此謂識無邊。識處者,如天住處名天處。此識已受持定,此謂識處定。入正受處者,得彼於識處定者,越虛空事,三分成就,以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住於寂寂修定果報。是功德生識處,如初廣說。生識入功德者,修行識處入,命終生識處天,壽命四千劫識入已竟。
이 식이 무변인 것을 식무변이라 한다. 식처는 천(天)의 거주처를 천처라 하는 것과 같고, 이 식을 이미 수지한 정(定)을 식처정이라 한다. 처에 들어 정수(正受)한다는 것은 그것을 얻은 자가 식처정에서 허공사(虛空事)를 초월해 3분을 성취하고, 세 가지 선으로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고, 정을 닦은 과보에 적적하게 머무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식처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식입(識入)을 일으킨 공덕이란 식처입을 수행하여 목숨이 마친 뒤 식처천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수명은 4천겁이다.[식입을 마친다.]
念無邊識定過患。爾時坐禪人已得識處,自在欲起無所有處定,越於識處。復更思惟,識處定麤、無所有處定細,復見識處過患、復見無所有處定功德。
무변식정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식처의 자재를 얻고 나서 무소유처정을 일으켜 식처를 초월하려고 한다. 또 다시 “식처정은 거칠고, 무소유처정은 미세하다”고 사유한다. 또 식처의 과환을 보고, 또 무소유처정의 공덕을 본다.
云何識處過患?此定近虛空爲怨,識事爲麤,以思惟無邊想成彼念著不得勝分,無所有處功德是其對治。
무엇이 식처의 과환인가. 이 정은 원수로 여기는 허공과 가깝고, 식사(識事)가 거칠며, 무변상을 사유함으로써 그 염착을 이루어 승분을 얻지 못하는데, 무소유처의 공덕은 그것을 대치하는 것이다.
彼坐禪人如是已見識處過患、復見無所有處功德,從識處定安詳而起,彼識不復修行,不復分別,成失彼識。已見無所有處相自在,心願受持,如是現作意,不久從識處想起。以由無所有處想其心得安。彼明無邊識定坐禪人越一切識處,見無所有入正受處住。一切者,說於無餘。越識處者,成越此識超入正度,此謂越一切識處。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식처의 과환을 보고 나서 다시 무소유의 공덕을 보고, 식처정으로부터 느긋하게 일어나 그 식을 다시는 닦지 않고, 다시는 분별하지 않아 그 식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무소유처상(無所有處相)이 자재함을 보고 나서는 수지하기를 마음으로 원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식처상으로부터 일어나 무소유처상으로 인해 그 마음이 편안함을 얻는다. 무변식정을 밝힌 그 좌선인은 일체의 식처를 초월하여 무소유를 보고, 그 처에 들어가 정수하여 머문다.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한다. 식처를 초월한다는 것은 이 식을 초월해 올바른 분별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일체식처를 초월하는 것이라 한다.
無所有者,不復修行、不復分別、成失彼識、但見無所有,此謂無所有處。入無所有處定心心數法,此謂無所有處。無所有處者何義?是識無性,是無所有。無所有處者,說受持言,無所有受持正定,此謂無所有處定。
무소유란 다시는 수행하지 않고 다시는 분별하지 않아 그 식이 없어지게 되고 무소유만 보는 것이니, 이것을 무소유처라 한다. 무소유처정에 든 심법ㆍ심수법, 이것을 무소유처라 한다. 무소유처란 무슨 뜻인가. 이 식은 성(性)이 없으니, 이것이 무소유이다. 무소유처란 무소유라는 말을 수지하고 정정(正定)을 수지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소유처정이라 한다.
入正受住者,成得無所有定,越識事三分,成就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住於寂寂脩定果報。是功德生無所有處,如初廣說。生無所有功德者,修行無所有處定,命終生無所有天,壽命六千劫無所有定竟。
들어가 정수하고 머문다는 것은 무소유정을 얻게 되어 3분의 식사(識事)를 초월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여, 마땅히 정을 닦은 과보로 적적함에 머무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무소유처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무소유에 태어나는 공덕이란 무소유처정을 수행하여 목숨을 마친 뒤에 무소유천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수명은 6천겁이다.[무소유정을 마친다.]
念無所有處過患。爾時坐禪人於無所有處已得自在,欲起非想非非想處定越無所有處。復更思惟無所有處麤、見非想非非想處細,復見無所有處過患,復見非想非非想處定功德。
무소유처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무소유처에서 자재함을 얻고 나서 비상비비상처정을 일으켜 무소유처정을 초월하려고 한다. 또 다시 “무소유처는 거칠다”고 사유하고, 비상비비상처는 미세하다고 본다. 또 무소유처의 과환을 보고, 또 비상비비상처정의 공덕을 본다.
云何無所有定過患?此定近識爲怨,與分明想共故成麤,成彼念著不得勝上。如是見無所有處過患,復見非想非非想入功德是其對治。
무엇이 무소유정의 과환인가. 이 정은 원수로 삼는 식과 가깝고, 분별상과 함께 하는 까닭에 거친 것이 되고, 그것에 염착을 이루어 승상(勝上)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무소유처의 과환을 보고, 또 비상비비상입의 공덕을 보니, 이것은 그것의 대치이다.
復次見此想是患、是癰、是刺,無想是政、是寂寂、是妙,所謂非想非非想。彼坐禪人如是已見,念入無所有處安詳而起。彼無所有處寂寂作意脩行餘定,如是現作意,不久從無所有處想心起,由非非想處想而心得安。彼明非非想定坐禪人,越一切無所有處故,成就入住非非想處。一切者,說於無餘。
또 이 상(想)은 근심[患]이고, 등창[癰]이며, 가시[刺]이지만 무상(無想)은 올바름이며, 적적이며, 묘이며, 소위 비상비비상이라고 본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보고 난 뒤 염으로 무소유처에 들어갔다가 느긋하게 일어나 그 무소유처에 대해 적적하게 작의하여 나머지 정을 수행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무소유처의 상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 비비상처의 상으로 인해 마음의 편안을 얻는다. 비비상정을 밝힌 그 좌선인은 일체무소유처를 초월한 까닭에 비비상처를 성취하여 들어가 머문다.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한다.
越無所有處者,成越無所有處超入正度,此謂越一切無所有處。非非想者,彼無所有處寂寂作意修行餘定,此謂非非想處。非非想處者,入非非想處心心數法,是謂非非想處。非非想處者何義?滅分明想故成於無想,細想有餘故,成非想非非想是其處,是謂非非想。
무소유처를 초월한다는 것은 무소유처의 초월을 이루어 초입정탁(超入正度)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체무소유처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비비상이란 그 무소유처에서 적적하게 작의하여 나머지 정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비비상처라 한다. 비비상처란 비비상처에 들어간 심법ㆍ심수법으로 이것을 비비상처라 한다. 비비상처란 무슨 뜻인가. 분명한 상[分明想]을 소멸하는 까닭에, 상이 없어지지만 미세한 상[細想]은 남아있는 까닭에 비상비비상이 그 처가 되니, 이것을 비비상이라 한다.
入正住者,成得非非想處定,越無所有處,三分成就三種善,十想具足,二十二功德相應,住於寂寂明修定果報。以是功德生非非想天,如初廣說。是功德生非非想天者,脩行非非想處定,命終生非非想天,壽命八萬四千劫。
들어가 올바로 머문다는 것은 비비상처정을 얻어 무소유처의 3분을 초월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축하고, 22공덕과 상응하고, 적적하고 밝은 정을 닦은 과보에 머무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비비상천에 태어나는 것은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이 공덕으로 비비상천에 태어난다는 것은 비비상처정을 수행하여 목숨을 마친 뒤에 비비상천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수명은 8만4천겁이다.
問:何故說非非想處?何故不說爲識處?
答:離無邊執故起想細故,不成識處。
【문】무슨 까닭에 비비상처라고 말하고, 무슨 까닭에 식처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무변의 집착을 떠나는 까닭에, 일으키는 상(想)이 세밀한 까닭에 식처가 되지 않는다.
問:何故依此定不成漏盡?
答:離分明想,不堪得見道。復次此定最細微,非非想不能分別,是故不成漏盡處非非想定已竟。
【문】무슨 까닭에 이 정에 의지해서 누진(漏盡)을 이루지 못하는가?
【답】분명한 상을 벗어나도 감히 견도를 얻지는 못한다. 또 이 정은 가장 미세하여 비비상으로도 분별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누진처를 이루지 못한다.[비비상정을 마친다.]
重明上義。
거듭 위의 뜻을 밝힌다.
問:於是定處。云何散句?
答:所謂滅聲。顚倒起越外行覺受疑不應得。
【문】이 정처에서 무엇이 산구(散句)인가?
【답】소위 멸성(滅聲)ㆍ전도(顚倒)ㆍ기(起)ㆍ월(越)ㆍ외행(外行)ㆍ각(覺)ㆍ수(受)ㆍ의(疑)는 마땅히 얻어서는 안 된다.
滅者,入初禪語言斷;入第四禪出入息斷。次第滅聲者,若人入定,聞有音聲,不得言說。何以故?是入定人耳識不和合故。復次入色定人,是聲成亂。如世尊所說:入禪人聲是其刺。
멸성(滅聲)이란 초선에 들어 어언(語言)을 끊는 것이고, 제4선에 들어 출입하는 식(息)을 끊는 것이다. 차제(次第)의 멸성이란 만약 사람이 정에 들면 어떤 음성을 듣거나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에 든 사람은 이식(耳識)과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색정에 든 사람은 이 소리로 혼란케 되는데 세존께서 “선에 든 자에게는 소리가 그 가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顚倒者,入地一切入,於非地想而作地想。
전도(顚倒)란 지일체입에 들어 지상(地想)이 아닌 것을 지상이라 여기는 것이다.
問:若然,何故不成顚倒?
答:此四顚倒想不異故,知此地想是其相,是故不成顚倒。
【문】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 전도가 성립되지 않는가?
【답】이 4전도의 상과 다르지 않은 까닭에, 이 지상이 바로 그 상(相)인 것을 아는 까닭에, 전도가 성립되지 않는다.
起者,以五因緣從於定起:以威儀苦、以最多境界、以障碍起、以方便不平等、以隨意。若入無色定,以最多境界不得起,住不動故。入滅禪定及入果定,以初作行得起,不以餘因。
기(起)란 다섯 가지 인연에 의해 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인연은 위의(威儀)의 고통, 너무 많은 경계, 장애가 생김, 방편의 불평등, 뜻에 따름[隨意]이라는 다섯 가지이다. 만약 무색정에 든다면 경계가 아주 많더라도 일어날 수 없나니, 부동에 머물기 때문이다. 멸선정(滅禪定)에 들고, 과정(果定)에 들었을 때에는 처음에 지었던 행으로 일어날 수 있지 다른 원인으로는 일어나지 못한다.
越者,越有二種:分越、事越。從色禪越色定,是謂分越。從色禪越無色定,復從無色定,越無色定。是謂事越。
월(越)이란 다음과 같다. 월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분월(分越)과 사월(事越)이다. 색선(色禪)으로부터 색정으로 초월하는 것을 분월이라 하고, 색선으로부터 무색정으로 초월하는 것, 또 무색정에서 무색정으로 초월하는 것을 사월이라 한다.
外行者,一切定外行成就五分。
외행(外行)이란 일체정의 외행으로, 5분을 성취한다.
覺者,第二禪等性,除無間成無覺觀。
각(覺)이란 제2선 등에서 그 성을 간단없이 제거하여 무각무관을 성취한다.
受者,第四禪等性,除無間共捨起。有人樂相似無閒。
수(受)란 제4선 등에서 그 성을 간단없이 제거하여 함께 사기(捨起)한다. 어떤 사람은 낙상사무간(樂相似無間)에 있다.
疑者,未斷一切貪欲等蓋,住非非想處,說於有餘,如畏毒蛇上樹。有四種人不得起定,必墮惡趣:無因作五逆邪見散句已竟,地一切入已滿。
의(疑)란 아직 일체 탐욕 등의 개(蓋)를 끊지 못한 상태에서 비비상처에 머물며 유여(有餘)를 설하는 것이니, 독사를 두려워해 나무 위로 오르는 것과 같다. 네 종류의 사람은 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반드시 악취에 떨어지며, 원인 없이 5역(逆)과 사견을 짓는다.[산구(散句)를 마친다. 지일체입에 대한 설명을 완료한다].
問:云何水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起?何功德?云何取其相?
答:心緣水相,此謂水一切入。心住不亂,此謂修行。於水一切入專意爲相,不除水想,是味,心不作二意是處。
【문】무엇이 수일체입(水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相)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답】마음이 수상(水相)을 반연하는 것을 수일체입이라 한다. 마음이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수일체입에 오로지 뜻을 모으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수상(水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마음이 두 가지 뜻을 내지 않는 것이 그 처이다.
於水一切入不共五功德:於地出沒自在、於地出宮殿、令動令降雨、令身能起水、令化江海。於地一切入所說功德,亦共有明修水一切入,處處皆見水。
수일체입에는 공유하지 않는[不共]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땅에 출몰이 자재하며, 대지ㆍ산ㆍ궁전을 흔들고, 비를 내리고, 몸에서 물이 솟게 하고, 강과 바다로 변화시킨다. 지일체입에서 설한 공덕을 또한 공유하며, 수일체입을 분명히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물을 본다.
云何取其相者,若取水一切入,於水現取相,若自然水、若自作水。於是舊坐禪人於非水處取水相,彼人處處見水,若於井於甁、若於池沼江湖淮海,是其所觀隨意卽見,彼分水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수일체입을 취하려면 물에서 현재 그 상을 취하는데, 그 물은 자연수(自然水)나 자작수(自作水)이다. 여기서 구참 좌선인은 수처(水處)가 아닌 곳에서 수상(水相)을 취한다. 그런 사람은 곳곳에서 물을 보고, 그가 관하는 우물ㆍ병ㆍ연못ㆍ늪ㆍ강ㆍ호수ㆍ바다에서 뜻대로 즉시 피분(彼分)을 본다. 그러면 수상(水相)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렇지 않다.
新坐禪人於作處取相,不能於非作處明修水一切入方便。彼坐禪人從初以觀,如是寂寂處,若寺舍、若石室、若樹下、是處不闇、不日光炙,無塵無風、無蚊蚋等,無諸障碍。
신참 좌선인은 작처(作處)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수일체입의 방편을 분명히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처음부터 절이나 석실이나 나무 밑 등 이와 같은 적적처를 살펴야 하는데 그 곳은 어둡지 않고, 햇빛이 강하지 않고, 먼지도 없고, 바람도 없고, 벌레도 없고, 모든 장애도 없어야 한다.
於如是處,若鉢若瓫埋淨地中,令與地平,周迴一尋盛以兩水,不雜以餘色水,令滿鉢瓫。應於此處作意水想,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餘事如地一切入。廣說至非非想處水一切入已竟。
이와 같은 곳에서 발우나 독[瓮]을 깨끗한 땅에 묻어 땅과 평평하고 지름이 1심(尋)이 되게 하고, 빗물을 채워 다른 색깔이 섞이지 않게 한다. 물로 발우나 독을 가득 채우고는 이 처(處)에서 수상(水想)을 작의하고, 3행 즉 평등관ㆍ방편ㆍ이난(離亂)으로써 상을 취해야 한다. 다른 것은 지일체입에서 비비상처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수일체입을 마친다.]
問:云何火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相?
答:心於火相,此謂火一切入。彼時心住不亂,此謂修行。火相巧於放意爲相,不除火想爲味,作意無雙爲處。
【문】무엇이 화일체입(火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相)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답】마음이 화상(火相)을 반연하는 것을 화일체입이라 한다. 그때 마음이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 이것을 수행이라 한다. 뜻을 두었을 때 불의 모양이 교묘한 것을 상으로 삼는다. 화상(火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고,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共五功德:於火一切入經營、起煙炎以光明相起、滅餘色光、隨意所燒、以作光明曉了於火界,如地一切入所說功德。因修火一切入,處處皆見火。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으니, 화일체입에서 경영하고, 연기와 불꽃을 일으키고, 광명상(光明想)을 일으켜 다른 색의 빛을 소멸하고, 뜻대로 타는 것에서 광명을 만들고, 화계를 환히 깨닫는 것이다. 지일체입에서 설한 것과 같은 공덕이 있고, 화일체입을 닦음으로써 곳곳에서 모두 불을 본다.
云何取其相者,若現取火一切入,於火取相,或於自作處、或自然處。於是舊坐禪人取於自然相,彼處處見,或草火、或薪火、或林火、或屋火,熾燃焰盛。從此爲初,以作於觀。或自樂不樂,卽見彼分火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만약 현재에서 화일체입을 취하려면 불에서 그 상을 취하는데, 그 불은 자작처(自作處)이거나 자연처(自然處)이다. 여기서 구참 좌선인은 자연상을 취한다. 그는 곳곳에서 초화(草火)나 신화(薪火)나 임화(林火)나 옥화(屋火)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고, 이것을 처음으로 삼아 관(觀)을 지음으로써 스스로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彼分)을 본다. 그러면 화상(火相)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와 같지 않다.
新坐禪人唯於作處取相,不能於非作處;彼修火一切入方便。新坐禪人從初經營,斷截樵薪,於淸淨處積聚焚燒,或日出時、或日入時,從下焚燒,於草薪皆不作意,於上生煙火皆不作意,於聚焰中現作火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初廣說火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오직 작처에서만 상을 취해야 하니, 그는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화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참 좌선인은 처음부터 경영하여 땔나무를 잘라 청정한 곳에 쌓고 태우는데, 해가 뜰 때나 해가 질 때에 밑에서부터 태운다. 풀이나 땔감 등에 대해서 모두 작의하지 않고, 위로 생겨나는 연기나 불꽃에 대해서도 모두 작의하지 않고, 불덩이 속에서 현재 화상을 작의하여 평등관ㆍ방편ㆍ이난(離亂)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화일체입을 마친다.]
問:云何風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答:心於風相,此謂風一切入。脩心住不亂,此謂修風一切入。放意爲相,不除風想爲味,作意無雙爲處。
【문】무엇이 풍일체입(風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답】마음이 풍상(風相)을 반연하는 것을 풍일체입이라 한다.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 이것을 풍일체입을 닦는 것이라 한다. 뜻을 두는 것[放意]을 상으로 삼는다. 풍상(風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同三功德,於風一切入風行自在、能令風起、作意受持令淸涼。如地一切入所說功德,修風一切入方便。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세 가지 공덕이 있으니, 풍일체입에서 바람의 움직임이 자재하며, 능히 바람을 일으키고, 작의하고 수지하여 청량하게 한다. 지일체입에서 설한 것과 같은 공덕이 있고, 풍일체입의 방편을 닦는다.
云何取其相者,新坐禪人現取風一切入,以二行取於風相,或見、或觸。云何以見取相?彼坐禪人,或甘蔗園、或於竹林、或多草處,以風鼓動。彼已見,作風想,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是已見取相。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신참 좌선인은 현재 풍일체입을 취함에 있어 보거나 감촉하는 두 가지 행으로써 풍상을 취한다. 무엇이 봄으로써 상을 취하는 것인가. 그 좌선인은 사탕수수 밭이나 대밭이나 풀이 우거진 곳이 바람으로 요동치면, 그는 이것을 보고 나서 풍상을 짓고 평등관ㆍ방편ㆍ이난(離亂)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이와 같이 보고 나서 상을 취한다.
云何以觸取相?新坐禪人如是寂寂坐處作意想,隨風來處是處穿壁作孔,竹荻爲筒安置其內,當筒處坐,使風觸其身,作意取風相。如是以觸取相。
무엇이 감촉으로 상을 취하는 것인가. 신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적적한 좌처에서 상(想)을 작의한다. 바람에 불어오는 곳을 따라 그곳에 벽을 뚫어 구멍을 내고, 대나무나 억새로 통발을 만들어 그 안에 설치한다. 그리고는 통발을 설치한 곳에 앉아 바람이 몸에 닿게 하여 작의하고 풍상을 취한다. 이와 같이 접촉으로 상을 취한다.
若舊坐禪人於處處分卽見風相起,若行住坐臥風觸其身,隨風所動於初已作觀,若自樂不樂,卽見彼分風相得起。不如新坐禪人風一切入已竟。
만약 구참 좌선인이라면 곳곳에서 즉시 피분(彼分)을 본다. 그러면 풍상이 일어나게 된다. 행ㆍ주ㆍ좌ㆍ와에 바람이 그 몸에 닿는 것, 바람 따라 움직이는 것을 처음에 이미 관함으로써, 스스로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풍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와 같지 않다.[풍일체입을 마친다.]
問:云何靑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答:心於靑相,此謂靑一切入。修彼心住不亂,此謂修。於靑相放意爲相,不除靑想爲味,作意無雙爲處。
【문】무엇이 청일체입(靑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답】마음이 청상(靑相)을 반연하는 것을 청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이라 한다. 청상에서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한다. 청상(靑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同五功德,於靑一切入心緣隨逐得淨解脫,得靑除入如靑花,心受持令化種種靑色。脩靑一切入,處處皆見靑。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청일체입을 마음이 반연하여 따르고 좇으며, 청정한 해탈을 얻고, 푸른 꽃과 같은 청색의 수승처[除入]를 얻고, 마음으로 수지하여 갖가지를 청색으로 변화시키고, 청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청색을 본다.
云何取其相者,取靑一切入相,若作處、若自然處,舊坐禪人取不作處相。彼坐禪人於處處見,或靑花、或靑衣、或靑色,於其目前常見,隨若樂若不樂,卽見彼分靑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작처나 자연처에서 청일체입의 상을 취한다. 구참 좌선인은 작처가 아닌 곳에서 상을 취한다. 그 좌선인은 곳곳에서 보고, 푸른 꽃이나 푸른 옷이나 푸른색을 눈앞에 두고서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청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와 같지 않다.
新坐禪人取於作處相,不能取非作處修靑一切入方便。彼坐禪人於衣於板於壁處,以阿多思花色靑色,以此色作曼陁羅花,或三角或四角,以異色繞其外。於此作靑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餘如初廣說靑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청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옷이나 판(板)이나 벽에 아사다꽃[阿思多花] 색의 청색으로, 이런 색으로 만다라화를 만들고 다른 색으로 3각이나 4각의 테두리를 두른다. 이렇게 만든 청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이난(離亂)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청일체입을 마친다.]
問:云何黃一切入?何脩?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相?
答:心於黃相,此謂黃一切入。修彼心住不亂,此謂修。於黃一切入放意是相,不除黃想爲味,作意無雙爲處。
【문】무엇이 황일체입(黃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답】마음이 황상(黃相)을 반연하는 것을 황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修]이라 한다. 황일체입에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황상(黃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同五功德,於黃一切入心隨逐得淨解脫,得黃除入作意,如金花種種黃色,修黃一切入處處皆見黃。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황일체입을 마음이 따르고 좇으며, 청정한 해탈을 얻고, 황금 꽃과 같은 황색의 수승처를 얻어 작의하고, 갖가지를 황색으로 변화시키고, 황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황색을 본다.
云何取彼相者,現取黃一切入,取於黃相,若自作處、若自然處,於是取非作處相。彼坐禪人於處處見,或黃花、或黃衣黃色,從此常見,隨樂不樂卽見彼分黃相得起,非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현재에서 황일체입을 취할 때에는 자작처나 자연처에서 황상을 취한다. 여기서 작처가 아닌 곳에서 상을 취하는 그런 좌선인은 곳곳에서 보고, 노란 꽃이나 노란 옷이나 노란색 이런 것들로부터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황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와 같지 않다.
新坐禪者取於已作處相,不能於非作處修黃一切入方便。彼坐禪人或衣或板或壁,以迦尼羅花色黃色,作曼陁羅花,或三角或四角,異色繞其外。於彼作黃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除亂。餘如初廣說黃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황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옷이나 판이나 벽에 가니라꽃[迦尼羅花] 색의 황색으로 만다라화를 만들고, 다른 색으로 3각이나 4각의 테두리를 두른다. 이렇게 만든 황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제난(除亂)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황일체입을 마친다.]
問:云何赤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答:心於赤相,此謂赤一切入。彼修心住不亂,此謂修。於赤相放意爲相,不離赤想爲味,作意無二爲處。
【문】무엇이 적일체입(赤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답】마음이 적상을 반연하는 것을 적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修]이라 한다. 적상에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적상(赤相)을 떠나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共四功德,於赤一切入隨心得淨解脫,得赤除入,化種種赤色。不共功德者,如說於地一切入。修赤一切入,處處皆見赤。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네 가지 공덕이 있다. 적일체입을 마음이 따르고, 청정한 해탈을 얻고, 적의 수승처를 얻고, 갖가지를 적색으로 변화시킨다. 공유하지 않는 공덕[不共功德]은 지일체입에서 설한 바와 같고, 적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적색을 본다.
云何取其相者,現取赤一切入,取於赤相,若作處、若自然處。舊坐禪人於自然處取相,於處處見相,或赤花、或赤衣、或赤色,從此爲初常見,隨樂不樂,卽見彼分赤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현재에서 적일체입을 취할 때에는 작처나 자연처에서 적상을 취한다. 구참 좌선인은 자연처에서 상을 취하여 곳곳에서 상을 보고, 붉은 꽃이나 붉은 옷이나 붉은색에서 시작해 이런 것들로부터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적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렇지 않다.
新坐禪人於作處取相,不能於非作處修赤一切入方便。彼坐禪人,或衣處或板或壁處,如槃偸時婆花生赤色,或以朱丹作曼陁羅花,或三角或四角,以異色界其外。於此作赤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初廣說赤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적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옷이나 판이나 벽에 반투시파꽃[槃偸時婆花]과 같은 적색이나 주단(朱丹)으로 만다라화를 만들고, 다른 색으로 3각이나 4각의 테두리를 두른다. 이렇게 만든 적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이난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적일체입을 마친다.]
問:云何白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答:心於白相,此謂白一切入。彼修心住不亂,此謂修。於白相放意爲相,不離白想爲味,作意無二爲處。
【문】무엇이 백일체입(白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답】마음이 백상(白相)을 반연하는 것을 백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修]이라 한다. 백상에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백상(白想)을 떠나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共八功德,於白一切入隨心得淨解脫,得白除入,伏懈怠眠,除闇作明,白一切入得起天眼。餘功德如地一切入所說。修白一切入,處處皆見白。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여덟 가지 공덕이 있다. 백일체입을 마음이 따르고, 청정한 해탈을 얻고, 백의 수승처를 얻고, 게으름을 조복하고, 수면을 조복하고, 어두움을 없애고, 밝음을 만든다. 백일체입은 천안(天眼)을 일으킨다. 나머지 공덕은 지일체입에서 설한 바와 같다. 백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백색을 본다.
云何取其相者,現取白一切入,於白取相,若作處、若自然處。舊坐禪人於自然處取相,彼於處處見相,或白花、或白衣、或白色、或月光、或日光、或星色、或鏡圓,從彼爲初常見,隨樂不樂,卽見彼分白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현재에서 백일체입을 취할 때에는 작처나 자연처의 백색에서 상을 취한다. 구참 좌선인은 자연처에서 상을 취한다. 그는 곳곳에 상을 보고, 하얀 꽃이나 하얀 옷이나 하얀색이나 달빛이나 햇빛이나 별빛이나 둥근 거울에서 시작해 그런 것들로부터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백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렇지 않다.
新坐禪人於作處取相,非不作處取相修白一切入方便。彼坐禪人,或於衣處或板或壁處,以太白星等色,以此色作曼陁羅花,或三角四角,以異色界其外。於此作白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初廣說白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백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옷이나 판이나 벽에 태백성(太白星)과 같은 이런 색으로 만다라화를 만들고, 다른 색으로 3각이나 4각의 테두리를 두른다. 이렇게 만든 백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이난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백일체입을 마친다.]
問:云何光明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答:心作光明相,此謂光明一切入。彼脩心住不亂,此謂修。光明放意爲相,不離光明想爲味,作意無二爲處。
【문】무엇이 광명일체입(光明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답】마음이 광명상(光明相)을 만드는 것, 이것을 광명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修]이라 한다. 광명에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삼고, 광명상(光明想)을 떠나지 않는 것이 그 맛이며,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與白功德等,脩光明一切入處處見光明。
어떤 공덕이 있는가. 백의 공덕과 같다. 광명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광명을 본다.
云何取其相者,現取光明一切入,於光明取相,若作處、若自然處。舊坐禪人於自然處取相,彼於處處見相,或月光、或日光、或燈光、或珠光從,彼初常見,隨樂不樂,卽見彼分光明卽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현재에서 광명일체입을 취할 때에는 작처나 자연처의 광명에서 상을 취한다. 구참 좌선인은 자연처에서 상을 취한다. 그는 곳곳에서 상을 보고, 달빛이나 햇빛이나 등불 빛이나 구슬 빛에서 시작해 그런 것들로부터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광명이 즉시 일어난다. 신참 좌선인은 그렇지 않다.
新坐禪人於作處取相,不能於非作處修光明一切入方便。彼坐禪人,如是或作東西壁,坐令水滿鉢,安置日光所至處。從彼水光起曼陁羅,從曼陁羅光起著壁光,於此見光明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初廣說光明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광명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벽을 만들고 앉아서는 물을 발우에 채우고 햇빛이 닿는 곳에 안치하여 그 물빛으로부터 만다라를 일으키고, 만다라로부터 빛이 생겨 벽에서 빛나게 한다. 이렇게 나타난 광명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이난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광명일체입을 마친다.]
解脫道論卷第五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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