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자료

해탈도론 제5권-8. 행문품 ②

bunnehaital 2022. 9. 24. 21:14

해탈도론 제5

 

8. 행문품

 

此明求第二禪

이제 제2선을 구하는 것을 밝힌다.

 

思惟初禪過患二禪功德爾時坐禪人欲樂起第二禪已於初禪身得自在何以故若於初禪未得自在雖復思惟欲除覺觀望得二禪還復退失遂不堪起第二禪定亦復不能入於初禪如世尊說爲諸比丘作山犢喩

초선의 과환2선의 공덕을 사유한다. 이때 좌선인은 즐겁게 제2선을 일으키고자 하고, 초선에서 몸에 자재를 얻는다. 왜냐하면 만약 초선에서 자재를 얻지 못하면, 비록 다시 사유하여 각관을 없애고 2선을 얻고자 하여도 또 다시 물러나 마침내 제2선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초선에 들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 모든 비구를 위하여 송아지[山犢]의 비유를 들어 설한 것과 같다.

 

山犢愚癡不知食處未解行步欲詣嶮遠便自作念我今當往未嘗至處噉未嘗草飮未嘗水前足未立復擧後腳蹉搖不安莫能前進遂不得至未嘗至處亦不得噉未嘗食草及不得飮未嘗之水更復思惟旣不能去政當資昔飮食

송아지가 어리석어 먹을 곳을 알지 못하고, 아직 걷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 험하고 먼 곳에 가고자 하여 곧 스스로 나는 이제 아직껏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 아직껏 먹어보지 못한 풀을 먹고, 마셔보지 못한 물을 마시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앞발도 들지 못하면서 또 뒷다리를 들고, 넘어지고 흔들리며 불안하여 능히 전진하지 못하기에 결국은 아직껏 이르지 못한 곳에 이르지 못하고, 아직껏 맛보지 못한 풀을 맛보지 못하고, 아직껏 먹어보지 못했던 물을 먹지 못한다. 그러면 다시 갈 수 없게 되었으니 예전에 먹던 음식에 의지해야겠구나라고 생각한다.

 

如是比丘愚癡未達不知所行處不解離欲入於初禪不修此法不多學習輒自作念欲入第二禪離於覺觀不解自安復更思惟我不能得入第二禪離於覺觀欲退入初禪離欲

이와 같이 비구가 어리석고 미숙해 행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욕심을 떠나 초선에 들어가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 법을 닦지 않고, 자주 학습하지 않았으면서 곧 스스로 2선에 들어 각관을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한다. 스스로 안정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제2선에 들어 각관을 벗어날 수가 없다. 물러나 초선에 들어 욕심을 벗어나고자 한다라고 생각한다.

 

愚癡比丘如彼山犢不解行步是故應修初禪令心得自在

어리석은 비구는 그 송아지처럼 걷는 방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마땅히 초선을 닦아 마음으로 하여금 자재를 얻게 하여야 한다.

 

於未食時及食後時初夜後夜隨心所樂隨欲久近隨意無礙爲起入觀若從一時乃至多時多入多出若從一時乃至多時於彼初禪成得自在得自在樂起第二禪越於初禪復更思惟此初禪麤第二禪細於初禪見有過患於第二禪見有功德

식사 전이나 식사 뒤, 또 초야와 후야에 마음이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 오랫동안 가까이 하고, 뜻에 따라 걸림 없이 일으켜 관에 들어야 한다. 만약 일시로 혹은 수시로 많이 들어가고 많이 나온다면, 만약 일시로 혹은 수시로 그 초선에서 자재를 얻게 되고 자재의 즐거움을 얻었다면 제2선을 일으켜 초선을 뛰어넘는다. 그리고 다시 이 초선은 거칠고, 2선은 미세하다라고 생각하고, 초선에 과환이 있는 것을 보고 제2선에 공덕이 있는 것을 본다.

 

云何初禪過患

答近五蓋怨令覺觀動身成懈怠心成散亂其一切法是爲麤定不任爲神通證旣樂初禪不成勝分是初禪過患

무엇이 초선의 과환인가?

원수로 여기는 5개와 가깝고, 각관을 움직이게 하여 몸은 게을러지고 마음은 산란하게 된다. 그 일체법은 거친 정[麤定]이 되어 신통의 증득은 감히 이룰 수 없고, 초선을 즐기게 되면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초선의 과환이다.

 

第二禪功德是其對治已觀初禪過患復見第二禪功德是一切入相作意修行第二禪事不作意和合初禪不作意於覺不作意於觀以從定生喜樂自在令心受持彼坐禪人如是作意不久覺觀成滅以定所起喜樂自在令心安住

2선의 공덕은 그것에 대한 대치이다. 이미 초선의 과환을 보았다면, 다시 제2선의 공덕을 보고 이 일체입(一切入)의 상()에 대해 작의하여 제2선의 사()를 수행하고, 초선과 화합하는 것을 작의하지 않고, ()을 작의하지 않고, ()을 작의하지 않고, 정으로부터 생긴 희락으로 자재하면 마음으로 수지하게 한다. 그 좌선인이 이와 같이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각관이 소멸하고 정으로써 일어난 희락이 자재하여 마음을 안주하게 한다.

 

此明二禪四枝義彼坐禪人覺觀滅故成其內信心成一性無覺無觀從定生喜樂入第二禪是地一切入功德覺觀滅者以善分別覺觀滅亦名斷

이제 2선의 4지의 뜻을 밝힌다. 그 좌선인은 각관이 소멸하는 까닭에 그 내신(內信)을 성취하고, 마음이 일성(一性)을 이루며, 각도 없고 관도 없으며, 정으로부터 희ㆍ락이 생겨 제2선에 든다. 이것은 지일체입의 공덕이다. 각관이 소멸한다는 것은 잘 분별함으로써 각ㆍ관이 소멸하는 것이며, 또는 단()이라고도 한다.

 

云何爲覺觀滅

亦是初禪覺觀過患及一切覺觀根覺觀過患及覺觀根與覺觀倂除故成覺觀滅復次以斷下麤禪得上勝禪復令現次第滅

무엇을 각ㆍ관의 소멸이라 하는가?

또한 이것은 초선의 각관의 과환, 및 일체 각관근(覺觀根)의 과환, 및 각관근과 각관을 함께 없애는 까닭에 각관의 소멸을 이룬다. 또 하열하고 거친 선[下麤禪]을 끊음으로써 훌륭하고 수승한 선[上勝禪]을 얻고, 또 현재에서 점차로 소멸하게 한다.

 

內者現證名內內有三種一內內二內定三內行處云何爲內內謂六內入內定者於自觀身此謂內定內行處者於內自思意不出外攝義是性是謂內行處於此經中內內是可樂

()란 현증(現證)을 내라 한다. 내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내내(內內), 둘째는 내정(內定), 셋째는 내행처(內行處)이다. 무엇이 내내인가. 소위 6내입(內入)이다. 내정이란 스스로 몸을 관하는 것을 내정이라 한다. 내행처란 안으로 스스로 생각하고 뜻을 밖으로 나가지 않게 하며 섭의(攝義)를 그 성질로 하는 것, 이것을 내행처라 한다. 이 경에서는 내내가 바로 즐길만한 것이다.

 

信者信正信思惟增長信此謂信於內定是謂內信

()이란 신ㆍ정신(正信)ㆍ사유증장신(思惟增長信)으로 이것을 신이라 한다. 내정에서는 이것을 내신(內信)이라 한다.

 

內信者何相何味何起何處不亂爲內信相寂寂爲味不濁是起覺觀爲處

내신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어지럽지 않은 것[不亂]이 내신의 상이고, 적적함이 그 맛이고, 혼탁하지 않은 것[不濁]이 그 일어남이고, 각ㆍ관이 그 처이다.

 

心成一性者謂心住正定此謂心成一性心成一性者何義心者是意一者說於念名性者如聲論說生性性者說自然義此第二禪一心能滅覺觀以一性得起此謂心成一性

마음이 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마음이 정정(正定)에 머무는 것이니, 이것을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마음이 일성에 머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마음이란 뜻[]이고, ()이란 염()을 말하는 것이다. ()이라 하는 것은 성론(聲論)에서 설하는 생성(生性)과 같다. 성이란 자연의 뜻을 말한다. 이 제2선에서는 일심이 능히 각ㆍ관을 소멸함으로써 일성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이라 한다.

 

心成一性者何相何味何起何處專正爲相寂寂爲味無浪爲起覺觀滅爲處

마음이 일성을 이룬다는 것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전정(專正)이 그 상이며, 적적이 그 맛이며, 일렁이지 않음[無浪]이 그 일어남이며, 각관의 소멸이 그 처이다.

 

信及心成一性何故非初禪所攝

初禪以覺觀爲浪動故成濁內信心成一性者成不淸淨如水有風浪見於面像不復淸淨如是初禪覺觀爲浪浪動濁故內信及心一性成不淸淨是故以禪枝非初禪所攝

믿음과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은 왜 초선에 포함되지 않는가?

초선에서는 각ㆍ관에 의해 물결이 움직이는 까닭에 혼탁하게 되고, 내신(內信)과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이 청정하지 않게 된다. 물에 풍랑이 있으면 면상(面像)을 보는 데 있어 또한 청정하지 않게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초선에서는 각ㆍ관이 물결이 되어 물결이 흔들리고 혼탁하게 되는 까닭에 내신 및 마음이 일성을 이루는 것은 청정하지 않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이 선지(禪支)는 초선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다.

 

無覺無觀者謂斷覺無覺離觀無觀

각도 없고 관도 없다[無覺無觀]는 것은 각을 끊어 각이 없고 관을 벗어나 관이 없는 것을 말한다.

 

問覺觀滅無覺無觀此二種斷覺觀何故說二

覺觀滅者爲現內信心一性爲因無覺無觀爲現寂寂所成喜樂妙相復次覺觀滅者以此覺觀見覺觀過患斷彼過患法無覺無觀者斷色界覺觀

각관의 소멸과 무각무관 이 두 가지는 모두 각ㆍ관을 끊는 것이다. 왜 이 두 가지를 설하는가?

각관의 소멸이란 내신을 나타내기 위함이고, 마음의 일성을 원인으로 한다. 무각ㆍ무관은 적적으로 이루어지는 희락의 오묘한 상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또 각관의 소멸이란 이 각관으로써 각관의 과환을 보고 그 과환법을 끊는 것이다. 무각ㆍ무관은 색계의 각관을 끊는 것이다.

 

復次無覺無觀者有二種一不以覺觀滅無覺無觀以覺觀滅無覺無觀於是五識及第三禪等不以覺觀滅成無覺無觀第二禪以方便寂寂故以覺觀滅成無覺無觀是說二義

또 무각ㆍ무관에는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각관의 소멸에 의하지 않는 무각ㆍ무관이고, (둘째는) 각관의 소멸에 의한 무각ㆍ무관이다. 오식(五識) 및 제3선 등에서는 각관의 소멸에 의하지 않고 무각ㆍ무관을 이룬다. 2선에서는 방편적적에 의하는 까닭에 각관의 소멸하여 무각ㆍ무관을 이룬다. 이것이 두 가지 뜻을 설하는 것이다.

 

從定生者名定初禪從彼智生第二禪成從初禪定生復次定者於第二禪與一心共生故定生喜樂喜樂者初已分別

()으로부터 생긴다고 하는 것은 정을 말한다. 초선은 그 지()로부터 생기고, 2선은 초선의 정으로부터 생긴다. 또 정이란 제2선과 일심에서 함께 생기는 까닭에 정은 희락을 생기게 한다. 희락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분별하였다.

 

第二禪者依初得名此第二禪入正受者謂入第二禪禪者內信一心是名爲禪入正受住者成得第二禪離於二枝成就二枝三種善十相具足二十三功德相應是天住是功德生光耀天如初廣說

2선이란 초선에 의해 얻어진 이름이다. 이 제2선에 들어 정수(正受)하는 것을 제2선에 드는 것이라 한다. 선이란 내신ㆍ희ㆍ락ㆍ일심, 이것을 선이라 한다. 정수에 들어 머문다는 것은 제2선을 얻고, 2지를 벗어나 2지와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3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이 천주(天住)이고, 이 공덕으로 광요천(光耀天)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天住者從定生喜樂越人住故名爲天住是故世尊告比丘言如池生水非四方來亦非雨出無有時節是從泉出淸冷浸灌盈溢流遠如是比丘此身從定生喜樂令得淸涼無不潤澤,。從定生喜周遍身心猶如泉水

천주란 정으로부터 희락을 일으켜 인간계를 초월해 머무는 까닭에 천주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샘에서 솟는 물은 사방에서 온 것도 아니고 비가 와서 생긴 것도 아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이로부터 샘물이 솟아 맑고 시원하고 고루 적시고 가득 넘치고 멀리 흐르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비구도 자기 몸에서 정으로부터 희락을 일으켜 청량함을 얻어 윤택하지 않은 곳이 없게 하고, 정으로부터 희를 일으켜 몸과 마음에 두루 변재하게 한다. 마치 샘물처럼.”

 

彼坐禪人入第二禪其身可知如不從四方無流水來無天雨水如是覺觀滅可知如是從泉出流令身成滿不起波浪如是從定生喜樂此名色身令滿不起亂心如以冷水令身淸涼遍一切處如是從定生喜樂一切名色身成滿足修定果報如是天居生光耀功德

그 좌선인은 제2선에 들어 그 몸을 가히 알 수 있다. 사방에서 온 것도 아니고, 흘러든 물도 없고, 하늘에서 내린 빗물도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각관이 소멸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샘에서 흘러나온 물이 그 몸을 가득 채우며 파랑이 일지 않듯이, 이와 같이 정으로부터 생긴 희락이 이 명색신(名色身)에 가득 차 어지러운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차가운 물이 몸을 시원하게 하고 모든 곳에 두루 미치듯이, 이와 같이 정으로부터 생기는 희락은 일체 명색신을 만족시킨다. 그리고 정을 닦은 과보로 이와 같이 천상에 거주하고 광요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얻는다.

 

此第二禪有三種是坐禪人修下禪命終生少光天壽命二劫修中禪生無量光天壽命四劫修上禪生光耀天壽命八劫

이 제2선에 세 종류가 있으니, 그것은 하ㆍ중ㆍ상이다. 이 좌선인이 하선을 닦으면 목숨을 마친 뒤 소광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2겁이다. 중선을 닦으면 무량광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4겁이다. 상선을 닦으면 광요천에 태어나며 수명은 8겁이다.

 

念二禪過患

2선의 과환을 염한다.

 

爾時坐禪人已修第二禪身得自在第二禪麤三禪寂寂知二禪過患見三禪功德起第三禪

그때 좌선인은 제2선을 닦아 몸에 자재를 얻고 나서, 2선은 거칠고 제3선은 적적하기에 제2선의 과환을 알고 3선의 공덕을 보아 제3선을 일으킨다.

 

云何二禪過患謂近覺觀是定之怨與喜滿相應故禪成麤以喜成滿心大踊躍不能起餘禪枝

무엇이 2선의 과환인가. 소위 각관에 가깝기에 이는 정의 적이고, 희의 가득함과 상응하는 까닭에 선이 거칠어진다. 희가 가득함으로써 마음은 크게 용약하지만, 능히 다른 선지(禪支)를 일으키지는 못한다.

 

若著於喜是則爲失若知是失則成不失若不堪作神通證若樂二禪不成勝分是知第二禪過患見第三禪功德是其對治已觀二禪過患復見三禪功德是依一切入相作意令喜心滅以由喜樂受持心如是作意不久以無喜樂令心得安

만약 희에 집착하면 이것은 곧 실()이 된다. 만약 이 실을 알면 곧 부실(不失)을 이룬다. 만약 신통의 증득을 감히 이루지 못하고 2선을 즐기면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한다. 이것이 제2선의 과환임을 알고, 3선의 공덕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그것에 대한 대치이다. 이미 2선의 과환을 보았으면 또 3선의 공덕을 보아, 일체입의 상을 의지해 작의하여 희심을 소멸시킨다. 희락을 수지하는 마음을 말미암아 이와 같이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희가 없는 낙[無喜樂]으로써 마음은 편안을 얻는다.

 

解三禪枝彼坐禪人不染喜故得捨念智以身受樂是聖所說得捨念智樂住第三禪正受是地一切入功德不染喜故喜者先已分別不染者斷喜得捨住

3선지를 풀이한다. 그 좌선인은 희에 오염되지 않는 까닭에 사()ㆍ염()ㆍ지()를 얻고, 몸으로 즐거움[]을 누린다.” 이것은 성스러운 가르침이다. 사ㆍ염ㆍ지ㆍ락을 얻고, 3선의 정수(正受)에 머무는 것, 이것은 지일체입(地一切入)의 공덕으로, 희에 오염되지 않는 까닭이다. 희란 앞에서 이미 분별했다. 오염되지 않는다는 것은 희를 끊고 사에 머무름을 얻는 것이다.

 

云何爲捨是捨是護不退不進是心平等此謂捨於是捨有八種謂受捨精進捨見捨菩提覺捨無量捨六分捨禪枝捨淸淨捨

무엇이 사()인가. 이 사는 호()이며, 물러나지도 나아가지도 않으며 마음이 평등한 것, 이것을 사라고 한다. 이 사에는 여덟 가지가 있으니, 수사(受捨)ㆍ정진사(精進捨)ㆍ견사(見捨)ㆍ보리각사(菩提覺捨)ㆍ무량사(無量捨)ㆍ육분사(六分捨)ㆍ선지사(禪支捨)ㆍ청정사(淸淨捨)이다.

 

五根爲受捨有時不作意捨相爲精進捨苦集我今當斷成得捨爲見捨修菩提覺是爲菩提捨慈悲喜捨是爲無量捨以眼見色不苦不喜成捨是爲六分捨無染故成捨住者是禪枝捨捨念淸淨是淸淨捨於此八捨除受捨餘七捨法是爲平等捨

5()이 수사가 된다. 때때로 작의하지 않는 사상(捨相)을 정진사라 한다. “괴로움과 집착[]을 나는 마땅히 끊어야 한다라고 하여 얻게 되는 사를 견사라 한다. 보리각을 닦는 것이 보리사이다. 자ㆍ비ㆍ희ㆍ사 이것은 무량사이다. 눈으로 색을 보아도 괴로워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사를 이루는 것, 이것이 6분사이다. 오염되지 않는 까닭에 사를 이루어 머무는 것, 이것이 선지사이다. 사를 청정하게 생각하는 것, 이것은 청정사이다. 8사 중에 수사를 제외한 나머지 7사법, 이것이 평등사이다.

 

復次有三種捨一相應乘二少經營三無經營

또 세 가지 사가 있으니 첫째는 상응승(相應乘), 둘째는 소경영(少經營), 셋째는 무경영(無經營)이다.

 

於一切禪行是禪平等方便不急疾不遲緩是名相應乘捨此下捨近第二禪能斷大踊躍心若心無經營是名少經營捨此捨近第三禪是其能斷一切踊躍心以不動身心無經營事心是名無事捨此捨近第四禪

일체의 선을 행함에 있어서 선()의 평등한 방편이 급하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은 것, 이것을 상응승사(相應乘捨)라 한다. 이것은 하사(下捨)로서 제2선에 가깝고, 능히 크게 용약하는 마음을 끊는다. 마음에 경영이 없는 것, 이것을 소경영사(少經營捨)라 한다. 이 사는 제3선에 가깝고, 이것은 능히 일체의 용약하는 마음을 끊는다. 움직이지 않는 몸과 마음으로써 사()를 경영하는 마음이 없는 것, 이것을 무사사(無事捨)라 한다. 이 사는 제4선에 가깝다.

 

捨者何相何味何起何處平等爲相無所著爲味無經營爲起無染爲處

사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평등이 그 상이고, 집착하는 바가 없는 것이 그 맛이며, 경영이 없는 것이 그 일어남이며, 오염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故說此捨於此禪非第二禪及初禪

是處喜滿未滅心著以緣喜樂是故未滅以大踊躍充遍身心是故於二種禪不說捨以不滿故於此第三禪無喜染故以滅相著故成起禪枝以由禪枝自在故說捨念正智云何爲念念隨念彼念覺憶持不忘念者念根念力正念此謂念

왜 이 사를 제2선이나 초선이 아닌 이 선에서 설하는가?

이 처는 희가 가득하고 아직 마음의 집착을 소멸하지 못한 것이다. 희락을 인연하는 까닭에 아직 소멸하지 못하고, 크게 용약함으로써 몸과 마음에 충만하다. 이러한 까닭에 두 가지 선에서는 사를 설하지 않나니, 충만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 제3선에서는 희의 오염이 없는 까닭에 상에 대한 집착을 소멸함으로써 선지를 일으키게 되고, 선지가 자재한 까닭에 사ㆍ염ㆍ정지(正智)를 설한다. 무엇이 염인가. 염은 수념(隨念)이고, 그 염은 기억하고 보전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염이란 근()을 염하고, ()을 염하는 정념(正念)으로 이것을 염이라 한다.

 

念者何相何味何起何處

隨念爲相不忘爲味守護爲起四念爲處

염은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수염(隨念)이 상이고, 잊지 않음이 맛이며, 수호가 일어남이며, 4념이 처가 된다.

 

云何爲智知解爲慧是正智此謂爲智於是正智有四種有義智自相智不愚癡智行處智於是有義智者有四威儀自相智者入於空處不愚癡智者知於世閒八法行處智者謂於事處於此經中行處智是可取

무엇이 지()인가. 지해(知解)는 혜()이며, 이 정지(正智)를 지라고 한다. 여기서 정지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즉 유의지(有義智)ㆍ자상지(自相智)ㆍ불우치지(不愚癡智)ㆍ행처지(行處智)이다. 여기서 유의지는 4위의를 갖는 것이고, 자상지는 공처에 드는 것이며, 불우치지는 세간의 8법을 아는 것이고, 행처지는 사()에 처하는 것이다. 이 경에서는 행처지를 취해야 한다.

 

智者何相何味何起何處

不愚癡爲相緣著爲味擇取諸法爲起正作意爲處

지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어리석지 않음을 상으로 삼고, 연착(緣著)을 맛으로 삼고, 모든 법을 선택하여 취함을 일어남으로 삼고, 바른 작의를 처로 삼는다.

 

何故此念正智一切處不妙

若人失念不起正智不堪起禪外行

어째서 이 염ㆍ정지는 일체처에서 빠지지 않는가?

만약 사람이 염을 잃으면 정지는 일어나지 않고, 선의 외행(外行)도 감히 일으킬 수 없다.

 

何故說第三禪不說第二禪及初禪

於此喜爲首麤禪枝滅故正定細故此定入細處以此正智堪能起第三禪是故以禪枝自在

왜 제3선을 설하고 제2선과 초선을 설하지 않는가?

여기서는 희가 으뜸이 된다. 거친 선지가 소멸하기 때문에, 정정(正定)이 세밀하기 때문에 이 정은 세밀한 곳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이 정지로써 능히 제3선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선지가 자재하게 된다.

 

復次此禪易起到彼樂處最氣味地亦作愚心是名著處是故於此禪知得自在堪爲斷喜又說喜樂者共爲親友是故此念智分別無喜有樂於事成住

또 이 선은 쉽게 일어나 그가 가장 좋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곳에 태어나게 하고, 또 어리석은 마음을 만든다. 이것을 착처(著處)라 한다. 이런 까닭에 이 선에서 자재를 얻을 줄 알아야 희를 끊는 것을 감당하게 된다. 또 희와 낙은 서로 친구라고 설한다. 이런 까닭에 이 염()ㆍ지()로 분별해야 희는 없고 낙이 있는 것이 일에 머물게 된다.

 

如彼犢子隨逐其母不捉兩耳觸突隨母如是無喜有樂以念智分別樂得住行處若不緩分別反入於喜成禪退分以此禪枝自在故說念智以此捨念智成就是故說有捨念智以身受樂

송아지가 어미를 따를 때 양쪽 귀를 잡아떼어놓지 않으면 어미에게 들러붙어 따라다니는 것과 같다. 희가 없고 낙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염ㆍ지로 분별해야 낙이 머물고 행할 곳을 얻게 된다. 만약 느슨하게 떼어놓지 않으면 도리어 희에 들어가 선이 퇴분을 이루게 된다. 이 선지가 자재한 까닭에 염ㆍ지를 설하고, 이것으로써 사ㆍ염ㆍ지를 성취하기 때문에 사ㆍ염ㆍ지가 있어 몸으로 즐거움을 누린다고 설한다.

 

云何心樂

心攝受是心樂從心觸生攝受是心樂受是謂爲樂

무엇이 마음의 즐거움[心樂]인가?

마음이 섭수하는 것을 심락이라 하며, 마음의 접촉으로부터 생기는 섭수가 심락수(心樂受)이다. 이것을 낙이라고 한다.

 

云何身

想陰行陰識陰此謂爲身此樂以身受謂身受樂

무엇이 몸[]인가?

상음(想陰)ㆍ행음(行陰)ㆍ식음(識陰) 이것을 몸이라 하고, 이 즐거움을 몸으로 받는 것을 신수락(身受樂)이라 한다.

 

何故此樂無喜非以身爲受

於第三禪樂根滅何故世尊說於第三禪樂根滅是樂聖人所說聖者佛及弟子開合制敎分別顯示此謂聖所說

왜 이 낙에는 희가 없으며, 몸으로 받는 것이 아닌가?

3선에서는 낙의 근이 소멸하기 때문이니, 왜냐하면 세존께서 3선에서 낙의 근은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이 낙은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니, ()이란 부처님과 제자이다. 열고, 합하고, 제교(制敎)하고, 분별하고, 현시하는 것, 이것을 성인께서 말씀하신 것이라 한다.

 

何故聖說於此身非餘處

此第三禪易起到彼樂處彼無受樂聖者向於樂住是聖人成就是故聖人說此禪勝成捨有念樂住者捨念樂此已分別

왜 성인께서는 다른 처가 아닌 이 몸에 대해 말씀하셨는가?

이 제3선은 쉽게 일어나 그 낙처에 도달하지만, 그곳에서 낙을 받는 것이 없다. 성자는 낙을 향하여 머물고, 이것을 성인은 성취한다. 이러한 까닭에 성인은 이 선이 훌륭하다고 말한다. ()를 이루며, ()이 있고, ()에 머무는 것이 사ㆍ염ㆍ낙이니, 이것은 이미 분별하였다.

 

成就入住第三禪第三者依第二名爲第三第三禪者是捨念正智一心此謂禪成就入住者彼已得第二禪離一分五分成就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天居生遍淨天如初禪廣說

3선을 성취하고, 들어가 머문다에서 제3은 제2에 의지하는 까닭에 제3이라 한다. 3선은 이 사ㆍ염ㆍ정지(正智)ㆍ낙ㆍ일심인데, 이것을 선의 성취라 한다. 들어가 머문다는 것은 그가 이미 제2선을 얻어 1분과 5분을 벗어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여 천상에 거주하고 변정천에 태어나니, 초선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天居者無喜樂住越人住名天居是故世尊告諸比丘如是比丘於鬱波羅池花分陁利池花若鬱波羅花波頭摩花分陁利花水生水增長從水起住水中從根至首以令水滿其中如是比丘此身以無喜樂令滿潤澤以無喜之樂遍滿身心

천상에 거주한다는 것은 희가 없는 낙에 머문다는 것으로 인간계를 초월해 머무는 것을 천상에 거주한다고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에게 이와 같이 비구여, 울파라 연못에 핀 꽃과 분다리 연못에 핀 꽃에서 울파라꽃ㆍ파두마꽃ㆍ분다라꽃 등은 물에서 생기고, 물에서 자라나고, 물로부터 일어나고, 물속에 머물면서 뿌리부터 머리까지 물속에 있게 한다. 이와 같이 비구여, 이 몸도 희가 없는 낙으로써 가득히 윤택하게 하며, 희가 없는 낙이 온 몸과 마음에 가득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於是如鬱多羅波頭摩分陁利花從水而起如是入第三禪其身當知如藕生水從根至首一切皆滿如是入第三禪其身以無喜之樂遍滿身心修定果報如是天居生遍淨天功德此第三禪亦成三種謂上於是坐禪人修行下禪命終生少淨天彼壽命十六劫修行中禪生無量淨天彼天壽命三十二劫修行上禪生遍淨天壽命六十四劫

여기서 울다라ㆍ파두마ㆍ분다리꽃이 물로부터 일어나듯, 이와 같이 제3선에 들면 그 몸은 연이 물에서 생겨나 뿌리부터 머리까지 일체에 가득함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제3선에 들면 그 몸은 희가 없는 낙으로써 몸과 마음에 가득하게 된다. 정을 닦은 과보로 이와 같이 천상에 거주하고 변정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얻는다. 이 제3선 역시 세 가지를 이루니, 곧 상ㆍ중ㆍ하이다. 여기서 좌선인이 하선을 수행하면 목숨을 마친 뒤 소정천(少淨天)에 태어나며, 그 수명은 16겁이다. 중선을 수행하면 무량정천(無量淨天)에 태어나고, 그 수명은 32겁이다. 상선을 수행하면 변정천에 태어나고, 수명은 64겁이다.

 

念三禪過爾時坐禪人如是已作第三禪身得自在樂起第四禪越第三禪第三禪麤第四禪妙見第三禪過患復見第四禪功德

3선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이와 같이 제3선을 지어 몸으로 자재의 즐거움을 얻고 나서, 4선을 일으켜 제3선을 초월한다. 3선은 거칠고, 4선은 묘하기에 제3선의 과환을 보고, 또 제4선의 공덕을 본다.

 

云何三禪過患謂近喜爲怨正定以樂枝麤不能堪忍爲得神通第三禪不成勝分如是見第三禪過患見第四禪功德是其對治彼坐禪人如是已見第三禪過患見第四禪功德唯彼作一切入相作意令現滅樂滅以由捨心受持如是作意不久以由捨心得安

무엇이 3선의 과환인가. 소위 원수로 여기는 희와 가깝기에 정정(正定)은 낙지(樂支)에 의해 거칠어지고, 감히 신통을 얻을 수 없어 제3선은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한다. 이와 같이 제3선의 과환을 보고 제4선의 공덕을 보니, 이것은 그것에 대한 대치이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제3선의 과환을 보고 제4선의 공덕을 보고는, 오로지 그는 일체입의 상에 대한 작의를 지어 현재에서 낙을 소멸한다. 없앰으로써 사()로 인해 마음이 수지되고, 이와 같이 작의하여 오래지 않아 사()로 인해 마음이 편안을 얻는다.

 

解四禪枝彼坐禪人斷樂故先已斷苦故以初喜憂盡故不苦不樂捨念淸淨成就住第四禪是地一切入功德

4선지를 풀이한다. 그 좌선인은 낙을 끊은 까닭에, 먼저 이미 고를 끊은 까닭에, 처음의 기쁨[]과 걱정[]이 모두 없어진 까닭에, 불고불락의 사념(捨念)이 청정함을 성취하여 제4선에 머문다. 이것이 지일체입의 공덕이다.

 

斷樂者名身樂斷斷苦者名身苦斷前喜憂滅者喜名心樂憂名心苦皆盡滅也

낙을 끊은 것은 몸의 즐거움을 끊는 것이고, 고를 끊는 것은 몸의 괴로움을 끊는 것이다. 이전의 기쁨과 걱정이 소멸한다는 것에서 기쁨이란 마음의 즐거움이고, 걱정이란 마음의 고통이다. 이것이 모두 남김없이 소멸하는 것이다.

 

樂苦憂已斷何處滅

初禪時滅於此第四禪佛說苦滅

즐거움과 고통과 걱정을 이미 끊었는데 어느 처에서 소멸하는가?

초선 때에 소멸한다. 이 제4선에서는 고가 소멸한다고 부처님께서 설하셨다.

 

何處苦根起無餘時滅

佛告比丘初禪成就離欲是處苦根起無餘時滅

어느 처에서 고근(苦根)이 일어나 무여시(無餘時)에 소멸하는가?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초선에서 이욕(離欲)을 성취한다. 이 처에서 고근이 일어나 무여시에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다.

 

何故於初禪苦根滅

以喜滿故身樂身樂故苦根滅以斷對治故是故於初禪苦根滅於第二禪憂根滅成斷憂根

어떠한 까닭에 초선에서 고근이 소멸하는가?

희가 가득한 까닭에 몸이 즐겁고, 몸이 즐거운 까닭에 고근이 소멸한다. ()으로 대치하는 까닭이다. 이러한 까닭에 초선에서 고근이 소멸하고, 2선에서 우근(憂根)이 소멸하며 우근이 끊어지게 된다.

 

如佛所說何處喜根起無餘時滅於此比丘覺觀滅故第三禪正受住是處憂根起無餘時滅

부처님께서 어느 처에서 희근이 일어나 무여시에 소멸하는가. 이 비구에게서 각과 관이 소멸하는 까닭에 제2을 정수하여 머물고, 이 처에서 우근이 일어나 무여시에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셨다.

 

何故第二禪憂根滅若有覺觀久隨覺觀成身懈怠成心懶墯若心懶墯憂根卽起於第二禪覺觀滅說憂根滅

어떠한 까닭에 제2선에서 우근이 소멸하는가. 만약 각ㆍ관이 있으면 오랫동안 각ㆍ관에 따라 몸이 게을러지고 마음이 나태해지며, 만약 마음이 나태해지면 우근이 곧 일어난다. 2선에서 각ㆍ관이 소멸하는 것을 우근이 소멸한다고 설한다.

 

於第三禪是處樂滅如世尊說何處樂根起無餘時滅於此比丘厭於喜故第三禪入正受住是處樂根已起無餘時滅

3, 이 처에서는 낙이 소멸한다. 세존께서 어느 처에서 낙근이 일어나며 무여시에 소멸하는가. 여기에서 비구는 희를 싫어하는 까닭에 제3선에 들어가 정수하여 머문다. 이 처에서 낙근이 이미 생겨나 무여시에 소멸한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何故於第三禪樂根滅

喜滅故喜爲因樂成滅是故於第三禪樂根滅

어떠한 까닭에 제3선에서 낙근이 소멸하는가?

희가 소멸하기 때문이다. 희는 낙의 소멸을 이루는 원인이다. 이러한 까닭에 제3선에서 낙근이 소멸한다.

 

問若苦樂憂於三禪處已滅何故於此四禪說滅

三禪是四禪道路於三禪已滅受是故於第四禪說滅

만약 고ㆍ락ㆍ우가 제3선에서 이미 소멸했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이 제4선에서 소멸한다고 설하는가?

3선은 이 4선에 이르는 길이며, 3선에서 이미 수()가 소멸한다. 이런 까닭에 제4선에서 소멸한다고 설하는 것이다.

 

復次以不苦不樂受爲現對治是故說苦樂對治不苦不樂受復次四禪共對治受收合故復次捨煩惱現無餘斷

또 불고불락의 수로써 현재에서 대치로 삼는다. 이러한 까닭에 고ㆍ락을 불고불락의 수로 대치한다고 설한다. 4선은 함께 수를 대치하여 거두어 모으는 까닭이며, 또 사()는 번뇌를 현재에서 남김없이 끊는 까닭이다.

 

不苦不樂受者意不攝受心不棄捨此謂不苦不樂受

불고불락의 수는 의가 섭수하지 않고, 마음이 버리지 않는다. 이것을 불고불락의 수라 한다.

 

不苦不樂受者何相何味何起何處中閒爲相住中爲味除是起喜滅是處

불고불락의 수는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일어남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는가. 중간을 상으로 하며, 중간에 머무는 것을 맛으로 하며, 없앰이 일어남이며, 희가 소멸하는 것이 처이다.

 

云何捨念淸淨者是謂中性爲捨此謂爲捨念者謂念隨念正念此謂爲念以捨爲念成分明淸白此謂捨念淸淨

무엇이 사()ㆍ염()ㆍ청정(淸淨)인가. 이 중성(中性)이라 하는 것이 사가 되나니 이것을 사라 한다. 염이란 그 염()이 수념(隨念)ㆍ정념(正念)인 것을 염이라 한다. 사로써 염을 삼아 분명(分明)ㆍ청백(淸白)을 이루는 이것을 사념청정(捨念淸淨)이라 한다.

 

何故此念以捨分明淸白

此捨離一切煩惱故受相似相應故成不動無經營以此無經營與捨相應故此念至無動成無經營是故此念已捨成分明淸白

어떠한 까닭에 이 염은 사로써 분명ㆍ청백이 되는가?

이 사는 일체번뇌를 벗어나는 까닭에, ()와 비슷하게 상응하는 까닭에, 부동(不動)ㆍ무경영(無經營)을 이룬다. 이 무경영으로 사와 상응하는 까닭에 이 염은 무동(無動)에 이르고, 무경영을 이룬다. 이러한 까닭에 이 염은 사로써 분명ㆍ청백을 이룬다.

 

四者依彼三禪此第四成就入定者此謂四禪捨念一心此謂禪成就入住者成得彼第四禪離一分三分成就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報居天上生果實天功德如初廣說

4란 그 3선에 의지해 이 제4가 성취된다. 입정(入定)이란 4선에서 사념이 일심인 것을 말하는데 이것을 선의 성취라 한다. 입주(入住)란 그 제4선을 얻게 되어 1분과 3분을 벗어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는 것이다. 그 과보로 천상에 거주하고, 과실천(果實天)에 태어나는 공덕을 이루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天居者捨樂住出於人住此謂天居是故世尊告諸比丘有人坐以白疊覆身從頭至足一切身分無處不著如以白疊無不覆處如是比丘以淸白心令滿一切身分以淸白心無所不著

천상에 거주한다는 것은 사의 즐거움에 머물러 인간계를 벗어나는 것이니, 이것을 천상에 거주하는 것이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 모든 비구에게 어떤 사람이 앉아서 흰 천을 겹쳐 몸을 감싸는데 머리부터 발에 이르기까지 온 몸 구석구석 두르지 않은 곳이 없다. 흰 천을 겹쳐 감싸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비구는 청백한 마음으로 온 몸 구석구석을 채워 청백한 마음이 닿지 않는 곳이 없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譬如有人白疊自覆是坐禪人亦復如是離一切上煩惱在第四禪可知如以白疊覆身從頭至足不寒不熱時節調和身心淸淨如是入第四禪不苦不樂是爲捨樂令滿於身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흰 천을 겹쳐 스스로 감싸는 것처럼, 이 좌선인 또한 이와 같이 모든 상번뇌(上煩惱)를 벗어나 제4선에 머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흰 천을 겹쳐 몸을 감싸 머리에서 발에 이르기까지 춥지도 덥지도 않게 하고 때를 잘 조절하여 몸과 마음을 청정하게 하듯이 이와 같이 제4선에 들어 불고불락 하니, 이것이 사의 즐거움을 온 몸에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修定果報如是天居生果實天功德修第四禪命終凡夫生果實天若心厭患生無想天壽命五十劫若沙門或生果實天或生五淨居處如是果實功德

정을 닦은 과보로 이와 같이 천상에 거주하고, 과실천에 태어나는 공덕을 얻는다. 4선을 닦다가 목숨을 마친 범부는 과실천에 태어난다. 만약 마음이 과환을 싫어하면 무상천(無想天)에 태어나며, 수명은 50겁이다. 만약 사문이라면 과실천에 태어나거나 5정거천에 태어나니, 이와 같은 과실의 공덕이 있다.

 

何故於三禪處下中上說果地勝不說第四禪

依三禪所得有麤有妙是故以勝枝說果地勝此第四禪已到妙枝彼岸從此更無妙枝是故於此無勝果地

어떠한 까닭에 3선처에는 하ㆍ중ㆍ상과 과지(果地)의 수승함을 설하면서 제4선에서는 설하지 않는가?

3선에서는 얻는 바에 거침이 있고 묘()가 있다. 이러한 까닭에 승지(勝支)로써 과지(果地)의 수승함을 설한다. 이 제4선은 이미 묘지(妙支)의 피안에 이르러, 이로부터 다시는 묘지가 없다. 따라서 여기에는 승과지가 없다.

 

念四禪過爾時坐禪人於第四禪已得自在樂遊虛空定越於色界復更思惟色定麤虛空定細彼坐禪人見色過患復見虛空定功德

4선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제4선에서 자재의 즐거움을 얻고 나서 허공정(虛空定)에 노닐며 색계를 초월한다. 또 다시 색정(色定)은 거칠고 허공정은 미세하다라고 사유하면서 그 좌선인은 색의 과환을 보고, 또 허공정의 공덕을 본다.

 

云何色過患如取器仗相打鬪諍兩舌妄語截手腳等種種諸事眼痛疾患寒熱飢渴諸苦是謂色欲過患

무엇이 색의 과환인가. 무기나 몽둥이를 들고 서로 때리고 싸우며, 이간질하고 거짓말하고 손발을 자르는 등의 갖가지 일이 있고, 눈이 아프고 병이 나고 덥고 춥고 목이 마르는 등 갖가지 고통이 있다. 이것을 색욕(色欲)의 과환이라 한다.

 

云何第四禪過患此近喜成怨依於色事是名爲麤於是著樂不成勝分依虛空寂寂解脫於此定成麤於色見第四禪過患見虛空定功德是其對治

무엇이 제4선의 과환인가. 이것은 원수로 여기는 희와 가깝고, 색사(色事)를 의지하는 까닭에 이것을 거칠다[]고 한다. 여기서 즐거움에 집착하면 승분(勝分)을 이루지 못하기에 허공에 의지해 적적한 해탈을 이룬다. 그리고 이 정에서 거칠음을 이루면 색에서 제4선의 과환을 보고, 허공정의 공덕을 본다. 이것이 그 대치이다.

 

彼坐禪人如是已見於色及見第四禪過患已見虛空定功德念入第四禪明無邊虛空定從此定起除地一切入相修虛空定地相成失於虛空所作事無邊作意若如此現作意不久地相成失從地相心起成越於虛空以虛空入相自在心得安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색을 보고 제4선의 과환을 보고 나서, 허공정의 공덕을 보고 나서, 염으로 제4선에 들어가 무변허공정을 밝히고, 이 정으로부터 일어나 지일체입의 상을 없애고, 허공정을 닦아 지상(地相)이 없어짐을 이루며, 허공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끝이 없다고 작의한다. 만약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지상이 없어지고, 지상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 허공으로 초월하게 되며, 허공입(虛空入)의 상이 자재함으로써 마음이 편안을 얻는다.

 

彼坐禪人已起一切色相有對想滅於種種想不作意故正受入住無邊空處

그 좌선인은 이미 일체의 색상(色相)을 초월하고 유대상(有對想)이 소멸하며,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 까닭에 무변공처(無邊空處)를 정수하여 들어가 머문다.

 

一切者說於無餘起色相者云何色相入色界定想智正智此謂色相越者從此起有對想滅者云何是有對想色想聲想香想味想觸想此謂有對想滅者彼種種想盡不作意者云何種種想不入定人或意界和合或意識界和合想智正智此謂種種想此種種想不作意此謂種種想不作意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한다. “색상을 초월한다에서 무엇이 색상인가. 색계정에 들었을 때의 상지(想智)ㆍ정지(正智), 이것을 색상이라 한다. “초월[]”이란 이것으로부터의 초월이다. “유대상이 소멸한다에서 무엇이 유대상인가. 색상(色想)ㆍ성상(聲想)ㆍ향상(香想)ㆍ미상(味想)ㆍ촉상(觸想), 이것을 유대상이라 한다. “소멸이란 그 갖가지 상이 다하는 것이다.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다에서 무엇이 갖가지 상인가. 정에 들지 않는 사람, 혹은 의계가 화합하거나, 혹은 의식계가 화합하거나, 상지ㆍ정지가 있는 것, 이것을 갖가지 상이라 한다. 그리고 이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 것, 이것을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

 

何故止說越想不說受行識

若越於想彼一切皆亦成越何以故若不離想心不得越復次世尊欲說越色事說越色想一切定事皆由想故

어떠한 까닭에 상을 초월한다고 설하는 것에서 그치고, 수ㆍ행ㆍ식은 설하지 않는가?

만약 상을 초월한다면 그 일체를 역시 모두 초월하게 된다. 왜냐하면, 만약 상을 떠나지 않으면, 마음이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세존께서는 색사(色事)를 초월하는 것을 설하고자 하시면서 색상(色想)을 초월하라고 설하셨으니, 일체 정의 일들은 모두 상에 의지하는 까닭이다.

 

若不爾入色定有對想種種想非爲無也

有人入色界定有對想有種種想以斷故

만약 그렇지 않다면, 색정에 들어도 유대상ㆍ갖가지 상은 없는 것이 아닌가?

어떤 사람이 색계정에 들어도 유대상과 갖가지 상이 있으니, 끊음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何故於彼不修道

爲厭於色是故於彼不滅於彼不盡故

어떠한 까닭에 거기에서 도를 닦지 않는가?

색을 싫어하는 까닭이다. 이런 까닭에 거기에게서는 소멸하지 않는다. 거기에서는 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入初禪聲是其刺如是佛所說於此爲厭色以修行道是故於此成斷於此斷故無色定不動行想寂寂解脫想如迦蘭鬱頭藍弗入無想定五百車從前去來不見不聞是故說於處滅

초선에 들었을 때는 소리[]가 그 자극[刺]이며,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와 같이 여기에서는 색을 싫어하기 위해 도를 수행한다. 이런 까닭에 여기에서 끊음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여기에서 끊는 까닭에 무색정ㆍ부동행상(不動行想)ㆍ적적해탈상이 있으니, 가란ㆍ울두람불이 무상정에 들어 5백 대의 수레가 이전과 같이 오고가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에 처에서 소멸을 말한다.

 

於是起一切色想說斷色界法有對想滅種種想不作意者說斷欲界法復次越一切色想者說得無色界有對想滅者說斷彼定外亂爲顯現無動種種想不作意者說斷定內亂說顯現寂寂解脫相

여기에서 일체 색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색계법을 끊고, 유대상이 소멸하는 것을 말한다.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욕계법을 끊는 것을 말한다. 또 일체 색상을 초월한다는 것은 무색계를 얻는 것을 말하고, 유대상이 소멸한다는 것은 그 정의 외란(外亂)을 끊고 무동(無動)을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갖가지 상을 작의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의 내란(內亂)을 끊고 적적해탈상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無邊虛空者云何爲空

是空入空界空穴不爲四大所觸此謂爲空於空正安心令滿無邊此謂無邊無邊空者是無邊空入入虛空處心心數法此謂虛空入虛空入者何義是虛空無邊性是無邊性空處此說虛空義如住天處名天處彼虛空處定此謂虛空處

무변허공에서 무엇이 공인가?

이것은 공입(空入)ㆍ공계(空界)ㆍ공혈(空穴)이다. 4대에 저촉되는 바가 아니므로 이것을 공이라 한다. 공에서 마음을 바르게 안정시켜 무변에 가득하게 되는 것, 이것을 무변이라 하다. 무변공이란 무변공입(無邊空入)이니 허공처에 든 심법과 심수법, 이것을 허공입이라 한다. 허공입이란 무슨 뜻인가. 이 허공은 무변성이고, 이 무변성이 공처이니, 이것을 허공의 뜻이라 한다. 그리고 천처(天處)에 거주하는 것을 천처라 하는 것과 같이, 그 허공처정을 허공처라 한다.

 

入正住者得虛空處定越色事三分成就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寂寂居住修定果報此功德生虛空處如初廣說功德生虛空者已修虛空處命終生虛空天壽命二千劫

들어가 올바로 머문다는 것은 허공처정을 얻어 색사(色事)3분을 초월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여 정을 닦은 과보에 적적하게 거주하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허공처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공덕으로 허공에 태어난다는 것은 이미 허공처를 닦았기에 목숨을 마친 뒤 허공천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니, 수명은 2천겁이다.

 

念虛空定過爾時彼坐禪人於虛空處已得自在樂起識一切入定越虛空一切入思惟虛空定麤見識處細復見虛空過患復見識處功德

허공정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그 좌선인은 허공처에서 자재의 즐거움을 얻고 나서, 식일체입정(識一切入定)을 일으켜 허공일체입을 초월한다. 그리고 허공정이 거친 것을 사유하고, 식처(識處)가 미세한 것을 본다. 또 허공의 과환을 보고, 또 식처의 공덕을 본다.

 

云何虛空過患此定近色爲怨於虛空定是事成麤與有對想種種想不相遠離成彼念著不得勝分如是見虛空過患是識一切入功德是其對治明無邊識定治

무엇이 허공의 과환인가. 이 정은 원수로 여기는 색과 가깝고, 허공정에서 이 일은 거침을 이룬다. 유대상이나 갖가지 상[種種想]과 서로 멀리 떨어지지 않기에 그 염에 집착하게 되어 승분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허공의 과환을 보고 식일체입의 공덕을 보고는 그 대치로서 무변식정을 밝힌다.

 

彼坐禪人已見如是虛空過患已見識處功德安詳念入安詳念起修虛空識令滿作意令識無邊由識處想心受持如是現作意不久從虛空處想心起越於識處由識處想而心得安彼坐禪人起一切虛空故思惟無邊識成就入正受於一切識處住

그 좌선인은 이미 이와 같이 허공의 과환을 보고, 이미 식처의 공덕을 보고, 느긋하게 입()을 염하며, 느긋하게 기()를 염한다. 그리고 허공식을 닦아 가득케 하고, 작의하여 식을 무변케 하고, 식처상을 말미암아 마음을 수지(受持)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허공처상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 식처로 초월하고, 식처상으로 인하여 마음이 편안함을 얻는다. 그 좌선인은 일체허공을 초월하는 까닭에 무변의 식을 사유하며, 일체식처에 들어가 정수(正受)를 성취하여 머문다.

 

一切者說於無餘越虛空處者越虛空處越者謂正度是謂越一切虛空處無邊識者唯彼虛空以識作意令滿無邊是謂無邊識處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하고, 허공처를 초월한다는 것은 허공처를 초월하는 것이다. 초월이란 올바로 분별[正度]이니, 이것은 일체 허공처를 초월하는 것이다. 무변의 식이란 오직 그 허공을 식으로 작의하여 끝없이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무변식처라 한다.

 

色非色法云何執爲無邊

唯無色法故成無邊何以故非色之法無有邊際不可得故

색법과 비색법 중에서 무엇을 무변으로 삼는가?

오직 무색법에 의지하는 까닭에 무변을 이룬다. 왜냐하면 색 아닌 법은 변제(邊際)가 없고, 가히 얻을 수도 없는 까닭이다.

 

復次虛空無邊故說無邊無邊者作無邊意故成無邊是故不妨識入處者是入識處心心數法此謂識處識處者何義

또 허공이 무변한 까닭에 무변을 설한다. 무변이란 무변이라는 생각을 짓는 까닭에 무변을 이루며, 이러한 까닭에 방해를 받지 않는 식이다. 입처(入處)란 식처에 들어간 심법ㆍ심수법으로 이것을 식처라 한다. 식처란 무슨 뜻인가.

 

是識無邊此謂識無邊識處者如天住處名天處此識已受持定此謂識處定入正受處者得彼於識處定者越虛空事三分成就以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住於寂寂修定果報是功德生識處如初廣說生識入功德者修行識處入命終生識處天壽命四千劫識入已竟

이 식이 무변인 것을 식무변이라 한다. 식처는 천()의 거주처를 천처라 하는 것과 같고, 이 식을 이미 수지한 정()을 식처정이라 한다. 처에 들어 정수(正受)한다는 것은 그것을 얻은 자가 식처정에서 허공사(虛空事)를 초월해 3분을 성취하고, 세 가지 선으로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고, 정을 닦은 과보에 적적하게 머무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식처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식입(識入)을 일으킨 공덕이란 식처입을 수행하여 목숨이 마친 뒤 식처천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수명은 4천겁이다.[식입을 마친다.]

 

念無邊識定過患爾時坐禪人已得識處自在欲起無所有處定越於識處復更思惟識處定麤無所有處定細復見識處過患復見無所有處定功德

무변식정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식처의 자재를 얻고 나서 무소유처정을 일으켜 식처를 초월하려고 한다. 또 다시 식처정은 거칠고, 무소유처정은 미세하다고 사유한다. 또 식처의 과환을 보고, 또 무소유처정의 공덕을 본다.

 

云何識處過患此定近虛空爲怨識事爲麤以思惟無邊想成彼念著不得勝分無所有處功德是其對治

무엇이 식처의 과환인가. 이 정은 원수로 여기는 허공과 가깝고, 식사(識事)가 거칠며, 무변상을 사유함으로써 그 염착을 이루어 승분을 얻지 못하는데, 무소유처의 공덕은 그것을 대치하는 것이다.

 

彼坐禪人如是已見識處過患復見無所有處功德從識處定安詳而起彼識不復修行不復分別成失彼識已見無所有處相自在心願受持如是現作意不久從識處想起以由無所有處想其心得安彼明無邊識定坐禪人越一切識處見無所有入正受處住一切者說於無餘越識處者成越此識超入正度此謂越一切識處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식처의 과환을 보고 나서 다시 무소유의 공덕을 보고, 식처정으로부터 느긋하게 일어나 그 식을 다시는 닦지 않고, 다시는 분별하지 않아 그 식이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무소유처상(無所有處相)이 자재함을 보고 나서는 수지하기를 마음으로 원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식처상으로부터 일어나 무소유처상으로 인해 그 마음이 편안함을 얻는다. 무변식정을 밝힌 그 좌선인은 일체의 식처를 초월하여 무소유를 보고, 그 처에 들어가 정수하여 머문다.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한다. 식처를 초월한다는 것은 이 식을 초월해 올바른 분별에 들어가는 것이니, 이것을 일체식처를 초월하는 것이라 한다.

 

無所有者不復修行不復分別成失彼識但見無所有此謂無所有處入無所有處定心心數法此謂無所有處無所有處者何義是識無性是無所有無所有處者說受持言無所有受持正定此謂無所有處定

무소유란 다시는 수행하지 않고 다시는 분별하지 않아 그 식이 없어지게 되고 무소유만 보는 것이니, 이것을 무소유처라 한다. 무소유처정에 든 심법ㆍ심수법, 이것을 무소유처라 한다. 무소유처란 무슨 뜻인가. 이 식은 성()이 없으니, 이것이 무소유이다. 무소유처란 무소유라는 말을 수지하고 정정(正定)을 수지하는 것이니, 이것을 무소유처정이라 한다.

 

入正受住者成得無所有定越識事三分成就三種善十相具足二十二功德相應住於寂寂脩定果報是功德生無所有處如初廣說生無所有功德者修行無所有處定命終生無所有天壽命六千劫無所有定竟

들어가 정수하고 머문다는 것은 무소유정을 얻게 되어 3분의 식사(識事)를 초월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족하고, 22공덕과 상응하여, 마땅히 정을 닦은 과보로 적적함에 머무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무소유처에 태어나니,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무소유에 태어나는 공덕이란 무소유처정을 수행하여 목숨을 마친 뒤에 무소유천에 태어나는 것을 말하며, 수명은 6천겁이다.[무소유정을 마친다.]

 

念無所有處過患爾時坐禪人於無所有處已得自在欲起非想非非想處定越無所有處復更思惟無所有處麤見非想非非想處細復見無所有處過患復見非想非非想處定功德

무소유처의 과환을 염한다.

그때 좌선인은 무소유처에서 자재함을 얻고 나서 비상비비상처정을 일으켜 무소유처정을 초월하려고 한다. 또 다시 무소유처는 거칠다고 사유하고, 비상비비상처는 미세하다고 본다. 또 무소유처의 과환을 보고, 또 비상비비상처정의 공덕을 본다.

 

云何無所有定過患此定近識爲怨與分明想共故成麤成彼念著不得勝上如是見無所有處過患復見非想非非想入功德是其對治

무엇이 무소유정의 과환인가. 이 정은 원수로 삼는 식과 가깝고, 분별상과 함께 하는 까닭에 거친 것이 되고, 그것에 염착을 이루어 승상(勝上)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무소유처의 과환을 보고, 또 비상비비상입의 공덕을 보니, 이것은 그것의 대치이다.

 

復次見此想是患是癰是刺無想是政是寂寂是妙所謂非想非非想彼坐禪人如是已見念入無所有處安詳而起彼無所有處寂寂作意脩行餘定如是現作意不久從無所有處想心起由非非想處想而心得安彼明非非想定坐禪人越一切無所有處故成就入住非非想處一切者說於無餘

또 이 상()은 근심[]이고, 등창[]이며, 가시[刺]이지만 무상(無想)은 올바름이며, 적적이며, 묘이며, 소위 비상비비상이라고 본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보고 난 뒤 염으로 무소유처에 들어갔다가 느긋하게 일어나 그 무소유처에 대해 적적하게 작의하여 나머지 정을 수행한다. 이와 같이 현재에서 작의하면 오래지 않아 무소유처의 상으로부터 마음이 일어나 비비상처의 상으로 인해 마음의 편안을 얻는다. 비비상정을 밝힌 그 좌선인은 일체무소유처를 초월한 까닭에 비비상처를 성취하여 들어가 머문다. 일체란 남김 없음을 말한다.

 

越無所有處者成越無所有處超入正度此謂越一切無所有處非非想者彼無所有處寂寂作意修行餘定此謂非非想處非非想處者入非非想處心心數法是謂非非想處非非想處者何義滅分明想故成於無想細想有餘故成非想非非想是其處是謂非非想

무소유처를 초월한다는 것은 무소유처의 초월을 이루어 초입정탁(超入正度)하는 것이다. 이것이 일체무소유처를 초월한다는 것이다. 비비상이란 그 무소유처에서 적적하게 작의하여 나머지 정을 수행하는 것이니, 이것을 비비상처라 한다. 비비상처란 비비상처에 들어간 심법ㆍ심수법으로 이것을 비비상처라 한다. 비비상처란 무슨 뜻인가. 분명한 상[分明想]을 소멸하는 까닭에, 상이 없어지지만 미세한 상[細想]은 남아있는 까닭에 비상비비상이 그 처가 되니, 이것을 비비상이라 한다.

 

入正住者成得非非想處定越無所有處三分成就三種善十想具足二十二功德相應住於寂寂明修定果報以是功德生非非想天如初廣說是功德生非非想天者脩行非非想處定命終生非非想天壽命八萬四千劫

들어가 올바로 머문다는 것은 비비상처정을 얻어 무소유처의 3분을 초월하고, 세 가지 선을 성취하고, 10상을 구축하고, 22공덕과 상응하고, 적적하고 밝은 정을 닦은 과보에 머무는 것이다. 이 공덕으로 비비상천에 태어나는 것은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 이 공덕으로 비비상천에 태어난다는 것은 비비상처정을 수행하여 목숨을 마친 뒤에 비비상천에 태어난다는 것이다. 수명은 84천겁이다.

 

何故說非非想處何故不說爲識處

離無邊執故起想細故不成識處

무슨 까닭에 비비상처라고 말하고, 무슨 까닭에 식처라고 말하지 않는가?

무변의 집착을 떠나는 까닭에, 일으키는 상()이 세밀한 까닭에 식처가 되지 않는다.

 

何故依此定不成漏盡

離分明想不堪得見道復次此定最細微非非想不能分別是故不成漏盡處非非想定已竟

무슨 까닭에 이 정에 의지해서 누진(漏盡)을 이루지 못하는가?

분명한 상을 벗어나도 감히 견도를 얻지는 못한다. 또 이 정은 가장 미세하여 비비상으로도 분별할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누진처를 이루지 못한다.[비비상정을 마친다.]

 

重明上義

거듭 위의 뜻을 밝힌다.

 

於是定處云何散句

所謂滅聲顚倒起越外行覺受疑不應得

이 정처에서 무엇이 산구(散句)인가?

소위 멸성(滅聲)ㆍ전도(顚倒)ㆍ기()ㆍ월()ㆍ외행(外行)ㆍ각()ㆍ수()ㆍ의()는 마땅히 얻어서는 안 된다.

 

滅者入初禪語言斷入第四禪出入息斷次第滅聲者若人入定聞有音聲不得言說何以故是入定人耳識不和合故復次入色定人是聲成亂如世尊所說入禪人聲是其刺

멸성(滅聲)이란 초선에 들어 어언(語言)을 끊는 것이고, 4선에 들어 출입하는 식()을 끊는 것이다. 차제(次第)의 멸성이란 만약 사람이 정에 들면 어떤 음성을 듣거나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정에 든 사람은 이식(耳識)과 화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색정에 든 사람은 이 소리로 혼란케 되는데 세존께서 선에 든 자에게는 소리가 그 가시이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顚倒者入地一切入於非地想而作地想

전도(顚倒)란 지일체입에 들어 지상(地想)이 아닌 것을 지상이라 여기는 것이다.

 

若然何故不成顚倒

此四顚倒想不異故知此地想是其相是故不成顚倒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까닭에 전도가 성립되지 않는가?

4전도의 상과 다르지 않은 까닭에, 이 지상이 바로 그 상()인 것을 아는 까닭에, 전도가 성립되지 않는다.

 

起者以五因緣從於定起以威儀苦以最多境界以障碍起以方便不平等以隨意若入無色定以最多境界不得起住不動故入滅禪定及入果定以初作行得起不以餘因

()란 다섯 가지 인연에 의해 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그 인연은 위의(威儀)의 고통, 너무 많은 경계, 장애가 생김, 방편의 불평등, 뜻에 따름[隨意]이라는 다섯 가지이다. 만약 무색정에 든다면 경계가 아주 많더라도 일어날 수 없나니, 부동에 머물기 때문이다. 멸선정(滅禪定)에 들고, 과정(果定)에 들었을 때에는 처음에 지었던 행으로 일어날 수 있지 다른 원인으로는 일어나지 못한다.

 

越者越有二種分越事越從色禪越色定是謂分越從色禪越無色定復從無色定越無色定是謂事越

()이란 다음과 같다. 월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분월(分越)과 사월(事越)이다. 색선(色禪)으로부터 색정으로 초월하는 것을 분월이라 하고, 색선으로부터 무색정으로 초월하는 것, 또 무색정에서 무색정으로 초월하는 것을 사월이라 한다.

 

外行者一切定外行成就五分

외행(外行)이란 일체정의 외행으로, 5분을 성취한다.

 

覺者第二禪等性除無間成無覺觀

()이란 제2선 등에서 그 성을 간단없이 제거하여 무각무관을 성취한다.

 

受者第四禪等性除無間共捨起有人樂相似無閒

()란 제4선 등에서 그 성을 간단없이 제거하여 함께 사기(捨起)한다. 어떤 사람은 낙상사무간(樂相似無間)에 있다.

 

疑者未斷一切貪欲等蓋住非非想處說於有餘如畏毒蛇上樹有四種人不得起定必墮惡趣無因作五逆邪見散句已竟地一切入已滿

()란 아직 일체 탐욕 등의 개()를 끊지 못한 상태에서 비비상처에 머물며 유여(有餘)를 설하는 것이니, 독사를 두려워해 나무 위로 오르는 것과 같다. 네 종류의 사람은 정을 일으키지 못하고 반드시 악취에 떨어지며, 원인 없이 5()과 사견을 짓는다.[산구(散句)를 마친다. 지일체입에 대한 설명을 완료한다].

 

云何水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起何功德云何取其相

心緣水相此謂水一切入心住不亂此謂修行於水一切入專意爲相不除水想是味心不作二意是處

무엇이 수일체입(水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마음이 수상(水相)을 반연하는 것을 수일체입이라 한다. 마음이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수행이라 한다. 수일체입에 오로지 뜻을 모으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수상(水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마음이 두 가지 뜻을 내지 않는 것이 그 처이다.

 

於水一切入不共五功德於地出沒自在於地出宮殿令動令降雨令身能起水令化江海於地一切入所說功德亦共有明修水一切入處處皆見水

수일체입에는 공유하지 않는[不共]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땅에 출몰이 자재하며, 대지ㆍ산ㆍ궁전을 흔들고, 비를 내리고, 몸에서 물이 솟게 하고, 강과 바다로 변화시킨다. 지일체입에서 설한 공덕을 또한 공유하며, 수일체입을 분명히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물을 본다.

 

云何取其相者若取水一切入於水現取相若自然水若自作水於是舊坐禪人於非水處取水相彼人處處見水若於井於甁若於池沼江湖淮海是其所觀隨意卽見彼分水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수일체입을 취하려면 물에서 현재 그 상을 취하는데, 그 물은 자연수(自然水)나 자작수(自作水)이다. 여기서 구참 좌선인은 수처(水處)가 아닌 곳에서 수상(水相)을 취한다. 그런 사람은 곳곳에서 물을 보고, 그가 관하는 우물ㆍ병ㆍ연못ㆍ늪ㆍ강ㆍ호수ㆍ바다에서 뜻대로 즉시 피분(彼分)을 본다. 그러면 수상(水相)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렇지 않다.

 

新坐禪人於作處取相不能於非作處明修水一切入方便彼坐禪人從初以觀如是寂寂處若寺舍若石室若樹下是處不闇不日光炙無塵無風無蚊蚋等無諸障碍

신참 좌선인은 작처(作處)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수일체입의 방편을 분명히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처음부터 절이나 석실이나 나무 밑 등 이와 같은 적적처를 살펴야 하는데 그 곳은 어둡지 않고, 햇빛이 강하지 않고, 먼지도 없고, 바람도 없고, 벌레도 없고, 모든 장애도 없어야 한다.

 

於如是處若鉢若瓫埋淨地中令與地平周迴一尋盛以兩水不雜以餘色水令滿鉢瓫應於此處作意水想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餘事如地一切入廣說至非非想處水一切入已竟

이와 같은 곳에서 발우나 독[]을 깨끗한 땅에 묻어 땅과 평평하고 지름이 1()이 되게 하고, 빗물을 채워 다른 색깔이 섞이지 않게 한다. 물로 발우나 독을 가득 채우고는 이 처()에서 수상(水想)을 작의하고, 3행 즉 평등관ㆍ방편ㆍ이난(離亂)으로써 상을 취해야 한다. 다른 것은 지일체입에서 비비상처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설명한 것과 같다.[수일체입을 마친다.]

 

云何火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相

心於火相此謂火一切入彼時心住不亂此謂修行火相巧於放意爲相不除火想爲味作意無雙爲處

무엇이 화일체입(火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마음이 화상(火相)을 반연하는 것을 화일체입이라 한다. 그때 마음이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 이것을 수행이라 한다. 뜻을 두었을 때 불의 모양이 교묘한 것을 상으로 삼는다. 화상(火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고,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共五功德於火一切入經營起煙炎以光明相起滅餘色光隨意所燒以作光明曉了於火界如地一切入所說功德因修火一切入處處皆見火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으니, 화일체입에서 경영하고, 연기와 불꽃을 일으키고, 광명상(光明想)을 일으켜 다른 색의 빛을 소멸하고, 뜻대로 타는 것에서 광명을 만들고, 화계를 환히 깨닫는 것이다. 지일체입에서 설한 것과 같은 공덕이 있고, 화일체입을 닦음으로써 곳곳에서 모두 불을 본다.

 

云何取其相者若現取火一切入於火取相或於自作處或自然處於是舊坐禪人取於自然相彼處處見或草火或薪火或林火或屋火熾燃焰盛從此爲初以作於觀或自樂不樂卽見彼分火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만약 현재에서 화일체입을 취하려면 불에서 그 상을 취하는데, 그 불은 자작처(自作處)이거나 자연처(自然處)이다. 여기서 구참 좌선인은 자연상을 취한다. 그는 곳곳에서 초화(草火)나 신화(薪火)나 임화(林火)나 옥화(屋火)가 활활 타오르는 것을 보고, 이것을 처음으로 삼아 관()을 지음으로써 스스로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彼分)을 본다. 그러면 화상(火相)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와 같지 않다.

 

新坐禪人唯於作處取相不能於非作處彼修火一切入方便新坐禪人從初經營斷截樵薪於淸淨處積聚焚燒或日出時或日入時從下焚燒於草薪皆不作意於上生煙火皆不作意於聚焰中現作火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初廣說火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오직 작처에서만 상을 취해야 하니, 그는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화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신참 좌선인은 처음부터 경영하여 땔나무를 잘라 청정한 곳에 쌓고 태우는데, 해가 뜰 때나 해가 질 때에 밑에서부터 태운다. 풀이나 땔감 등에 대해서 모두 작의하지 않고, 위로 생겨나는 연기나 불꽃에 대해서도 모두 작의하지 않고, 불덩이 속에서 현재 화상을 작의하여 평등관ㆍ방편ㆍ이난(離亂)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화일체입을 마친다.]

 

云何風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心於風相此謂風一切入脩心住不亂此謂修風一切入放意爲相不除風想爲味作意無雙爲處

무엇이 풍일체입(風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마음이 풍상(風相)을 반연하는 것을 풍일체입이라 한다.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 이것을 풍일체입을 닦는 것이라 한다. 뜻을 두는 것[放意]을 상으로 삼는다. 풍상(風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同三功德於風一切入風行自在能令風起作意受持令淸涼如地一切入所說功德修風一切入方便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세 가지 공덕이 있으니, 풍일체입에서 바람의 움직임이 자재하며, 능히 바람을 일으키고, 작의하고 수지하여 청량하게 한다. 지일체입에서 설한 것과 같은 공덕이 있고, 풍일체입의 방편을 닦는다.

 

云何取其相者新坐禪人現取風一切入以二行取於風相或見或觸云何以見取相彼坐禪人或甘蔗園或於竹林或多草處以風鼓動彼已見作風想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是已見取相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신참 좌선인은 현재 풍일체입을 취함에 있어 보거나 감촉하는 두 가지 행으로써 풍상을 취한다. 무엇이 봄으로써 상을 취하는 것인가. 그 좌선인은 사탕수수 밭이나 대밭이나 풀이 우거진 곳이 바람으로 요동치면, 그는 이것을 보고 나서 풍상을 짓고 평등관ㆍ방편ㆍ이난(離亂)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이와 같이 보고 나서 상을 취한다.

 

云何以觸取相新坐禪人如是寂寂坐處作意想隨風來處是處穿壁作孔竹荻爲筒安置其內當筒處坐使風觸其身作意取風相如是以觸取相

무엇이 감촉으로 상을 취하는 것인가. 신참 좌선인은 이와 같이 적적한 좌처에서 상()을 작의한다. 바람에 불어오는 곳을 따라 그곳에 벽을 뚫어 구멍을 내고, 대나무나 억새로 통발을 만들어 그 안에 설치한다. 그리고는 통발을 설치한 곳에 앉아 바람이 몸에 닿게 하여 작의하고 풍상을 취한다. 이와 같이 접촉으로 상을 취한다.

 

若舊坐禪人於處處分卽見風相起若行住坐臥風觸其身隨風所動於初已作觀若自樂不樂卽見彼分風相得起不如新坐禪人風一切入已竟

만약 구참 좌선인이라면 곳곳에서 즉시 피분(彼分)을 본다. 그러면 풍상이 일어나게 된다. 행ㆍ주ㆍ좌ㆍ와에 바람이 그 몸에 닿는 것, 바람 따라 움직이는 것을 처음에 이미 관함으로써, 스스로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풍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와 같지 않다.[풍일체입을 마친다.]

 

云何靑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心於靑相此謂靑一切入修彼心住不亂此謂修於靑相放意爲相不除靑想爲味作意無雙爲處

무엇이 청일체입(靑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마음이 청상(靑相)을 반연하는 것을 청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이라 한다. 청상에서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한다. 청상(靑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同五功德於靑一切入心緣隨逐得淨解脫得靑除入如靑花心受持令化種種靑色脩靑一切入處處皆見靑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청일체입을 마음이 반연하여 따르고 좇으며, 청정한 해탈을 얻고, 푸른 꽃과 같은 청색의 수승처[除入]를 얻고, 마음으로 수지하여 갖가지를 청색으로 변화시키고, 청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청색을 본다.

 

云何取其相者取靑一切入相若作處若自然處舊坐禪人取不作處相彼坐禪人於處處見或靑花或靑衣或靑色於其目前常見隨若樂若不樂卽見彼分靑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작처나 자연처에서 청일체입의 상을 취한다. 구참 좌선인은 작처가 아닌 곳에서 상을 취한다. 그 좌선인은 곳곳에서 보고, 푸른 꽃이나 푸른 옷이나 푸른색을 눈앞에 두고서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청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와 같지 않다.

 

新坐禪人取於作處相不能取非作處修靑一切入方便彼坐禪人於衣於板於壁處以阿多思花色靑色以此色作曼陁羅花或三角或四角以異色繞其外於此作靑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餘如初廣說靑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청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옷이나 판()이나 벽에 아사다꽃[阿思多花] 색의 청색으로, 이런 색으로 만다라화를 만들고 다른 색으로 3각이나 4각의 테두리를 두른다. 이렇게 만든 청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이난(離亂)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청일체입을 마친다.]

 

云何黃一切入何脩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相

心於黃相此謂黃一切入修彼心住不亂此謂修於黃一切入放意是相不除黃想爲味作意無雙爲處

무엇이 황일체입(黃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마음이 황상(黃相)을 반연하는 것을 황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이라 한다. 황일체입에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황상(黃想)을 없애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同五功德於黃一切入心隨逐得淨解脫得黃除入作意如金花種種黃色修黃一切入處處皆見黃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다섯 가지 공덕이 있다. 황일체입을 마음이 따르고 좇으며, 청정한 해탈을 얻고, 황금 꽃과 같은 황색의 수승처를 얻어 작의하고, 갖가지를 황색으로 변화시키고, 황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황색을 본다.

 

云何取彼相者現取黃一切入取於黃相若自作處若自然處於是取非作處相彼坐禪人於處處見或黃花或黃衣黃色從此常見隨樂不樂卽見彼分黃相得起非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현재에서 황일체입을 취할 때에는 자작처나 자연처에서 황상을 취한다. 여기서 작처가 아닌 곳에서 상을 취하는 그런 좌선인은 곳곳에서 보고, 노란 꽃이나 노란 옷이나 노란색 이런 것들로부터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황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와 같지 않다.

 

新坐禪者取於已作處相不能於非作處修黃一切入方便彼坐禪人或衣或板或壁以迦尼羅花色黃色作曼陁羅花或三角或四角異色繞其外於彼作黃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除亂餘如初廣說黃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황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옷이나 판이나 벽에 가니라꽃[迦尼羅花] 색의 황색으로 만다라화를 만들고, 다른 색으로 3각이나 4각의 테두리를 두른다. 이렇게 만든 황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제난(除亂)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황일체입을 마친다.]

 

云何赤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心於赤相此謂赤一切入彼修心住不亂此謂修於赤相放意爲相不離赤想爲味作意無二爲處

무엇이 적일체입(赤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마음이 적상을 반연하는 것을 적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이라 한다. 적상에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적상(赤相)을 떠나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共四功德於赤一切入隨心得淨解脫得赤除入化種種赤色不共功德者如說於地一切入修赤一切入處處皆見赤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네 가지 공덕이 있다. 적일체입을 마음이 따르고, 청정한 해탈을 얻고, 적의 수승처를 얻고, 갖가지를 적색으로 변화시킨다. 공유하지 않는 공덕[不共功德]은 지일체입에서 설한 바와 같고, 적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적색을 본다.

 

云何取其相者現取赤一切入取於赤相若作處若自然處舊坐禪人於自然處取相於處處見相或赤花或赤衣或赤色從此爲初常見隨樂不樂卽見彼分赤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현재에서 적일체입을 취할 때에는 작처나 자연처에서 적상을 취한다. 구참 좌선인은 자연처에서 상을 취하여 곳곳에서 상을 보고, 붉은 꽃이나 붉은 옷이나 붉은색에서 시작해 이런 것들로부터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적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렇지 않다.

 

新坐禪人於作處取相不能於非作處修赤一切入方便彼坐禪人或衣處或板或壁處如槃偸時婆花生赤色或以朱丹作曼陁羅花或三角或四角以異色界其外於此作赤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初廣說赤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적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옷이나 판이나 벽에 반투시파꽃[槃偸時婆花]과 같은 적색이나 주단(朱丹)으로 만다라화를 만들고, 다른 색으로 3각이나 4각의 테두리를 두른다. 이렇게 만든 적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이난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적일체입을 마친다.]

 

云何白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心於白相此謂白一切入彼修心住不亂此謂修於白相放意爲相不離白想爲味作意無二爲處

무엇이 백일체입(白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마음이 백상(白相)을 반연하는 것을 백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이라 한다. 백상에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삼는다. 백상(白想)을 떠나지 않는 것이 그 맛이다.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不共八功德於白一切入隨心得淨解脫得白除入伏懈怠眠除闇作明白一切入得起天眼餘功德如地一切入所說修白一切入處處皆見白

어떤 공덕이 있는가. 공유하지 않는 여덟 가지 공덕이 있다. 백일체입을 마음이 따르고, 청정한 해탈을 얻고, 백의 수승처를 얻고, 게으름을 조복하고, 수면을 조복하고, 어두움을 없애고, 밝음을 만든다. 백일체입은 천안(天眼)을 일으킨다. 나머지 공덕은 지일체입에서 설한 바와 같다. 백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모두 백색을 본다.

 

云何取其相者現取白一切入於白取相若作處若自然處舊坐禪人於自然處取相彼於處處見相或白花或白衣或白色或月光或日光或星色或鏡圓從彼爲初常見隨樂不樂卽見彼分白相得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현재에서 백일체입을 취할 때에는 작처나 자연처의 백색에서 상을 취한다. 구참 좌선인은 자연처에서 상을 취한다. 그는 곳곳에 상을 보고, 하얀 꽃이나 하얀 옷이나 하얀색이나 달빛이나 햇빛이나 별빛이나 둥근 거울에서 시작해 그런 것들로부터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백상이 일어나게 된다. 신참 좌선인은 그렇지 않다.

 

新坐禪人於作處取相非不作處取相修白一切入方便彼坐禪人或於衣處或板或壁處以太白星等色以此色作曼陁羅花或三角四角以異色界其外於此作白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初廣說白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백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옷이나 판이나 벽에 태백성(太白星)과 같은 이런 색으로 만다라화를 만들고, 다른 색으로 3각이나 4각의 테두리를 두른다. 이렇게 만든 백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이난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백일체입을 마친다.]

 

云何光明一切入何修何相何味何處何功德云何取其相

心作光明相此謂光明一切入彼脩心住不亂此謂修光明放意爲相不離光明想爲味作意無二爲處

무엇이 광명일체입(光明一切入)인가? 무엇을 닦음으로 삼고, 무엇을 상으로 삼고, 무엇을 맛으로 삼고, 무엇을 처로 삼고, 무엇이 그 공덕이며,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마음이 광명상(光明相)을 만드는 것, 이것을 광명일체입이라 한다. 그 마음을 닦아 어지러움 없이 머무는 것을 닦음[]이라 한다. 광명에 뜻을 두는 것을 상으로 삼고, 광명상(光明想)을 떠나지 않는 것이 그 맛이며, 작의하는데 둘이 없는 것이 그 처이다.

 

何功德者與白功德等脩光明一切入處處見光明

어떤 공덕이 있는가. 백의 공덕과 같다. 광명일체입을 닦으면 곳곳에서 광명을 본다.

 

云何取其相者現取光明一切入於光明取相若作處若自然處舊坐禪人於自然處取相彼於處處見相或月光或日光或燈光或珠光從彼初常見隨樂不樂卽見彼分光明卽起不如新坐禪人

어떻게 그 상을 취하는가. 현재에서 광명일체입을 취할 때에는 작처나 자연처의 광명에서 상을 취한다. 구참 좌선인은 자연처에서 상을 취한다. 그는 곳곳에서 상을 보고, 달빛이나 햇빛이나 등불 빛이나 구슬 빛에서 시작해 그런 것들로부터 항상 보고, 즐겁건 즐겁지 않건 그것을 따라 즉시 피분을 본다. 그러면 광명이 즉시 일어난다. 신참 좌선인은 그렇지 않다.

 

新坐禪人於作處取相不能於非作處修光明一切入方便彼坐禪人如是或作東西壁坐令水滿鉢安置日光所至處從彼水光起曼陁羅從曼陁羅光起著壁光於此見光明相以三行取相以平等觀以方便以離亂如初廣說光明一切入已竟

신참 좌선인은 작처에서 상을 취해야 하니, 작처가 아닌 곳에서는 광명일체입의 방편을 닦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좌선인은 이와 같이 동쪽이나 서쪽으로 벽을 만들고 앉아서는 물을 발우에 채우고 햇빛이 닿는 곳에 안치하여 그 물빛으로부터 만다라를 일으키고, 만다라로부터 빛이 생겨 벽에서 빛나게 한다. 이렇게 나타난 광명상에서 평등관ㆍ방편ㆍ이난의 세 가지 행으로써 상을 취한다. 앞에서 자세히 설한 바와 같다.[광명일체입을 마친다.]

 

解脫道論卷第五 甲辰歲高麗國分司大藏都監奉勅彫造